헤르만 헤세는 작가를 꿈을 꾸는 사람으로, 그리고 정신 분석자를 그 꿈을 해석하는 사람으로 보았다. 다시 말해, 문학을 감상하는 것과 해설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작품에 대한 '감상'은 '독해를 넘어선 -또는 그 이전의- 직관적 수용'을 필요로 하곤 한다.
김혜순 시인의 <날개 환상통>에 대한 접근 역시 이성의 몫이 아니다. 시집을 가득 채운 비틀린 언어들과 판타지적 표현들은 '단순 독해'만으로는 쉬이 와닿지 않는다.
개별적 시들을 모아 구성한 여느 시집과는 달리, 김혜순 시인의 <날개 환상통>은 모든 시가 연결된 하나의 이야기다. 그리고 첫 시는 그 긴 이야기의 서문 역할을 한다.
이 시집은 책은 아니지만 새하는 순서 그 순서의 기록 (…중략…)
신발을 벗고 난간 위에 올라서서 눈을 감고 두 팔을 벌리면 소매 속에서 깃털이 삐져나오는 내게서 새가 우는 날의 기록 새의 뺨을 만지며 새하는 날의 기록 (…후략…)
<새의 시집>, 김혜순
첫 시가 말하듯, 이 시집은 곧 화자가 '새하는' 날들, 그리고 그 순서의 기록이다. '새하기'라는, 시인이 이름 붙인 행위이자 수행문은 시집 전반을 걸쳐 반복되는 핵심 표현으로서, 수록된 모든 시들을 관통한다.
'새한다는 것'은 곧 무언가를 뛰어넘는, 또는 뿌리치는 행위이다. 여기서 '무언가'는 무궁무진하다. '새'는 그 수행문으로부터 구성된 '무언가'로, 여자로부터 비롯된, 그러나 그를 넘어선- 정체성 없는 잠재성이다. 그녀는 -혹은 새는- 탄생과 동시에 자신에게 씌워진 새장 -그 정체성- 을 입은 채 퍼득이며 '새한다'. 그녀에게 새장은 '물고기의 그물' 또는 '물고기의 튀김옷'에 지나지 않지만, 세상은 그것을 옷, 그리고 외투라 부르며 최면을 건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삶을 있는 힘껏 뿌리치기를 택한다.
당신은 답변의 세계에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중략…)
-명령을 받지 못한 나는 내가 아니다. … 당신은 이제 발을 한 발짝 떼고 걸어 나갈 수 있습니다, 말해주지 않으니, 나는 내가 아니다, 벽에 붙은 거울처럼 아무도 아니다.… 아니라는 명령이 없으니 나는 아니조차 아니다.
<최면의 여자>, 김혜순
그녀가 사는 세계 속에서 왕자는 멜로디하고, 공주는 리듬한다. 왕자는 고뇌하고, 정신하며, 내용하지만, 공주는 고통하고, 신경하며, 박자한다. 리듬은 반복되며, 양식화된 리듬은 그녀의 삶에 허구의 정체성을 입힌다. 시인은 이 '제도적 리듬'에 '시적 리듬'으로 맞서며 '새한다'. 그녀의 리듬은 해석도, 인식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녀는 어느 자아를 뿌리치는 동시에 또 다른 자아를 맞이하는 것이다.
시인은 '새하는 순서'를 이어나간다. 새는 출현하는 동시에 떠나며, 소멸하는 동시에 탄생한다. 새는 그녀를 '오려낸다'. 그녀는 구멍이 나는 동시에 탄생하며, 오려진 그녀의 구멍으로 나갔다가-들어오고, 생겨나다가-또 비워진다. 주체와 대상의 구분이 무너지는 것을 시작으로 새와 그녀의 경계는 더욱더 허물어지고, 세계로부터 추방된 채 우는 새의 통증은 그녀의 것이 되어 극심해져 간다. 통증이 커질수록 그녀는 처절하게 싸운다.
새가 나를 오린다 햇빛이 그림자를 오리듯
오려낸 자리로 구멍이 들어온다 내가 나간다 (…중략…)
내가 없는 곳으로 한 걸음 내가 없는 곳으로 한 걸음
<고잉 고잉 곤>, 김혜순
다시 첫 시, <새의 시집>으로 돌아가 그 마지막 연으로 향한다. '이것을 다 적으면/ 이 시집을 벗어나 종이처럼 얇은 난간에서/ 발을 떼게 된다는 약속'. 그녀는 시집 전반을 걸쳐 자신의 앎을 이미지화한다. 자신을 가둔 것들을,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와 몸짓을. 이미지로 그려진 '앎'을 응시한 그녀는 자신이 아는 바를 행할 것을, 즉 '새하는 행위'를 지속해 나갈 것을 약속한다. 자신이 몸담은 소설을 열고 나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세상이 옷이라 부르는 새장을 뿌리치고 알몸이 된다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