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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삼오 Sep 09. 2020

삶이 곧 죽어가는 과정이라면-

<눈사람 살인 사건>, 최승호

삶이 곧 죽어가는 과정이라면 
결국 인생에 거창한 의미 따위는 없는 거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길 택할 거라면 
-또는 당장 죽지 않고 죽어가길 택할 거라면 
나는 온기에 녹아 죽어가고 싶다 

스스로를 녹이는 어리석은 사람이라 여겨도 좋다 
나는 기꺼이 아름다운 어리석음을 택하겠다 
찬물에 몸을 담근 그들도 결국은 녹아내릴 테니 
그리고 그들은 결코 온기를 느끼지 못할 테니 

누군가는 내가 삶의 이유로 삼고 있는 온기가 그리고 사랑이
못 미더운 동아줄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나라고 모르겠는가 
그 동아줄은 늘 위태롭다 나 역시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위태로운 동아줄에 몸을 맡기겠다 
동아줄이 끊어지는 그날의 추락을 두려워 않고 
내가 택한 동아줄을 굳게 믿겠다 
그 동아줄을 붙잡고 매 순간 힘껏 타고 오르겠다 
언젠가 동아줄이 끊어지는 날이 온다면 

나는 기꺼이 추락하겠다 
따뜻한 물에 스스로의 몸을 녹인 눈사람처럼 




그날 눈사람은 텅 빈 욕조 위에 누워 있었다. 

뜨거운 물을 틀기 전에 그는 더 살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자살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으며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는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텅 빈 욕조 속에 누워 있을 때 뜨거운 물과 찬 물 중에서 어떤 물을 틀어야 하는 것일까. 눈사람은 그 결과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 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것을 지켜보다 잠이 들었다.

욕조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피어올랐다. 

<눈사람 자살 사건>, 최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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