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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삼오 Dec 06. 2020

파랑보다 짙고 어두운

영화 <무드 인디고>

 영화는 무언가를 바쁘게 타이핑하는 사람들을 클로즈업하며 시작한다. 그들은 기계적인 무표정으로 타자기를 두드린다. 그들이 타이핑하고 있는 것은: 콜랭의 삶이다.

 콜랭이 사는 세상은 '무엇 하나 뜻대로 되지 않는' 곳이다. 그의 삶은 그가 속한 시대와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다. 콜랭은 '그의 삶을 입력하는 존재들'에 포함되지 않는다. 콜랭 자신의 삶임에도, 그에게는 그의 삶을 움직일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 그의 삶에도 사랑이 찾아온다. 우연히 알게 된 클로에와 춤을 추고, 사랑하고, 구름을 타고 날아오르고……. 클로에와의 시간은 더없이 찬란하다. 하지만 그의 사랑 역시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의 일부라는 것을 기억하자. 영원할 것만 같았던 행복은 클로에의 폐병을 시작으로 그 빛을 잃어간다.

 클로에는 오른쪽 폐에 수련(睡蓮)이 자라나는 병을 앓게 된다. 의사는 식물을 죽이는 약과 함께 두 가지를 당부한다. 첫째, 주위에 꽃을 많이 두어 폐 속의 수련에게 겁을 줄 것, 둘째, 물은 수련을 자라게 할 수 있으니 하루에 두스푼만 마실 것. 처음에는 꽃다발을 가슴팍에 얹어두는 것으로 잠시나마 생기를 되찾곤 했지만, 꽃도 금세 힘을 잃는다. 클로에는 들이닥치는 삶의 고통, 그리고 폐의 통증을 아름다운 꽃으로 막아보려 하지만, 곧 꽃의 생기마저도 힘을 잃고 만다. 뿐만 아니라, 수련이 자라나는 것을 막기 위해 물을 마시지 못하게 된 클로에는 갈증으로 고통스러워한다. 수련은 클로에의 폐뿐만 아니라, 그녀의 삶 전체를 압도한다.

 고통의 연쇄는 그치지 않는다. 클로에를 치료하기 위해 드는 막대한 돈을 감당하지 못한 콜랭은 노동을 시작한다. 알몸으로 엎드린 채 총에게(!) 체온을 양보하던 그는 체온과 더불어 마음의 온기까지도 잃어간다. 아무리 일을 해도 급여는 클로에의 치료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자금난에 빠진 콜랭은 그의 친구 니콜라를 외면하기에 이른다. 그의 삶 속 소중함들은 연결되어 한데 묶여있었기에, 클로에의 병은 곧 콜랭의 삶까지도 삼켜버린다. 영원이라는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모든 것들은 한순간 거품처럼 사라진다.

 영화는 '모든 것이 한순간이라면, 결국 영원한 것은 없다면, 본질이라는 건 과연 존재하긴 하는건지' 의문을 제기한다. 영화에는 '장 솔 파르트르'라는 철학자가 등장한다. 얼핏 봐도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가, '장 폴 사르트르'가 연상되는 이름이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인간은 태어남으로써 존재가 세상에 내던져지며, 이후에 살아가면서 자신의 본질을 탐구하고, 선택하게 된다'는 사상이다. '앉기 위한 물건'이라는 본질이 존재에 선행하는 의자와는 달리, 존재가 본질에 선행하는 인간은 자각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 속 '파르트르' 자신마저도 역시 존재의 위기 앞에서 속절 없는 모습이다. 파르트르가 찾고 선택한 자신의 본질, 즉 그 모든 거대담론과 당대를 뒤흔들던 사상들은 육체를 겨냥한 알리즈의 공격에 공중분해된다. 본질은 존재 자체의 위기 앞에서 무력하다.

 모든 것이 한낱 거품에 지나지 않는 세계에서 본질을 논하는 건 막연한 허상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언가를 좇고, 사랑하고, 또 무너진다. 미셸 공드리는 영화를 통해 어떠한 교훈을 전달하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보여주기'를 택한다.

 결국 삶에 결론이나 핵심 따위는 없다. 다만 삶은 순간의 연속일 뿐이다. 우리가 본질이기를 기대하는 그 모든 것들은 존재의 과정에 잠시 스칠 뿐, 이윽고 자취를 감춘다.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다'는 삶의 법칙 아래 갇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언젠가 끝날 찰나의 순간에 우리를 내던지는 것뿐이다. 알면서도 하릴없이 스스로를 내던지는 과정들이 모이면 인생이 된다. 스치는 사랑에 힘입어 순간의 연속을 살아가고, 그 사랑이 무너지면 슬퍼하고-. 우리를 살게 하는 것도,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것도 모두 '순간'이다. 그 허무한 아름다움과 긴 고통이 곧 우리의 삶이다.

 우리는 늘 '우리는 무얼 위해 사는가?'라는 질문에 명쾌한 답을 얻고 싶어하지만, 사실 그런 목적 같은 것은 없다. 존재하기에 사는 것이고, 살다보면 순간들이 우리를 스치고, 그 스쳐지나가는 바람들에 때로는 황홀해하기도, 때로는 무너지기도 하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걸 알면서도 또 한번 순간에 뛰어드는 날들- 그 날들의 색은 짙푸르다 못해 어둡다.


#무드인디고 #미셸공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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