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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삼오 Jul 31. 2020

그 여름이 지나고

<500일의 썸머>, 2009

 부모님의 이혼으로 생긴 트라우마와 함께 살아가는 썸머. 그녀는 관계의 규정, 그리고 그에 얽매이는 것을 두려워하고 피한다. 비록 '누군가의 무엇'이 되길 거부하는 썸머지만, 그렇다고 톰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안정적인 관계 대신 자유로움을 택했을 뿐. 하지만 그녀가 놓친 것은, 상대방의 불안함이다. 그녀는 사랑법은 자신의 트라우마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는 데에는 효과적이었지만, 동시에 상대에게 두려움을 안겨주는 방식이기도 했으니까.

 그런 그녀가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상대에 대한 호기심'이다. 그녀로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영역이자 톰의 관심사인 건축을 궁금해한다. 톰이 좋아하는 것을 질문하고, 그가 좋아하는 장소에 함께 가고, 톰이 설계도를 그릴 종이가 없을 때면 팔을 내어 주는 것. 그녀는 톰의 삶에 기꺼이 발을 내딛음으로써 사랑을 표현한다.

 한편 안정적인 연애를 꿈꾸는 톰은 관계의 규정을 피하는 썸머에 불안함을 느낀다. 연애에서도, 직장에서도 자유보다는 안정성을 꿈꾸는 그의 삶에 갑작스레 등장한 썸머는 그에게 행복이지만, 동시에 한 순간 사라질 것 같은 불안함이기도 하다.

 그런 톰이 썸머를 사랑하는 방식은 썸머와는 어긋나 있다. 그는 썸머를 궁금해하는 대신, 그의 관심사를 썸머와 나누고 싶어 한다. 썸머를 자신이 좋아하는 곳에 데려가고, 자신의 취향을 썸머에게 소개한다. 썸머가 상대방의 삶에 들어가는 것을 사랑이라 여겼다면, 톰은 상대를 그의 삶에 초대하는 것을 사랑이라 여긴 것이다. 그러나 톰은 상대가 자신의 삶에 들어오기까지의 용기를 가벼이 여긴다. 자신에게 맞춰진 대화의 포커스가 당연하다 느꼈고, 썸머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세계를 포용하기 위한 썸머의 노력을 알아채지 못한 채, 썸머와 그가 천생연분이라 믿는다. 하지만 그가 사랑했던 대상은 썸머가 아니라 '썸머와 함께할 때의 자신의 모습'일 지도.

 불안한 톰과 자유롭고 싶은 썸머, 상대방의 세계가 궁금한 썸머와 자신의 세계를 소개하고픈 톰. 어긋난 사랑법에 갈등은 끊이지 않고, 톰과 썸머는 지쳐간다. 이윽고 썸머는 상대방의 세계에 걸어 들어가기 위해 자신의 세계를 덮어두어야 하는 사랑은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없음을 깨닫고, 톰에게 이별을 고한다. 톰은 '갑작스러운' 이별에 무너져 내린다. 그는 끝내 그 이별의 이유를 깨닫지 못한 채 '떠나버린 운명'인 썸머를 그리워한다.

 시간이 흘러 기차 안에서 마주친 썸머와 톰. 톰은 그리워하던 썸머와의 만남에 기대를 품지만, 그 기대는 썸머의 네 번째 손가락에 자리한 반지에 완전히 무너져 내린다. 억울해하기도, 분노하기도 하는 톰에게 썸머는 "식당에 앉아서 도리언 그레이를 읽고 있었는데 어떤 남자가 내게 와선 책에 대해서 물어봤어. 그리고... 지금은 그 사람이 내 남편이고."라고 말한다.

 썸머가 꿈꾸는 사랑은, 서로가 서로의 세계에 발을 내딛는 것이었다. 그러나 톰은 썸머의 세계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헤어진 후 다시 마주친 날까지도 톰은 썸머에게 '행복의 건축'이라는 책을 선물한다. 역시 썸머의 세계와는 거리가 먼, 톰의 세계를 기준으로 한 선물이었다. 그런 톰과 함께하는 동안 지친 썸머 앞에 자신이 읽는 책을 궁금해해 주는 사람, 다시 말해 자신의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대가 나타나자 썸머는 비로소 그동안 느낄 수 없었던 확신을 느끼고, 마침내 '누군가의 무엇'이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버린 것이다.

 썸머와의 이별 이후 회사를 그만두고 건축회사 입사를 준비하던 톰은, 면접 대기 장소에서 어텀을 만난다. 톰만이 안다고 생각했던 장소를 좋아하며, 그 장소에서 보이는 풍경들 중 유일하게 흠이라고 느끼는 부분까지 일치하는 여자, 어텀은 자신의 세계를 공유하고 싶어 하는 톰과 우연인 듯 운명처럼 맞물린다. 애써 자신의 세계에 들어오고자 했던, 그래서 톰이 흠이라 여기는 주차장을 가리키며 '저건 뭐야?'하고 물었던 썸머와의 대화와는 달리 어텀과의 대화에서는 그 모든 것이 물 흐르듯 흐른다. 톰은 어텀에게 강하게 끌리고, 먼저 손을 내민다. 어텀이라면 자신의 세계를 어려움 없이 받아들일 테니까. 비로소 톰에게도 새로운 계절이 찾아오고- 가을의 첫날과 함께 유난히 길고 뜨겁던 500일의 여름은 막을 내린다.

 톰과 썸머의 연애가 끝난 것은 결국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닐 것이다. 그들이 이별한 것은 둘 중 하나의 사랑법이 100% 옳거나 그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사랑법이 맞물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라온 환경, 그 때문에 다를 수밖에 없었던, 그리고 조율할 수조차 없었던 각자의 성향,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큰 요인이었던 타이밍까지. 이 모든 것들이 맞아떨어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그렇기에 우리는 사랑을 기적이라 부른다.

 결과적으로 '썸머와 톰의 사랑'은 그 '기적'이 아니었고, 끝이 나지만, '썸머의 사랑', 그리고 '톰의 사랑'은 다른 이와 함께 이어진다. 공허하게만 느껴지던 이별은 곧 그들에게 새로운 연애를 위한 깨달음이 되어 돌아온다. 서로의 세계에 발을 내딛는 것을 사랑이라 생각하는 썸머, 그리고 자신의 세계에 상대를 초대하는 것을 사랑이라 생각하는 톰 각각은 자신에게 맞는 사랑을 찾았다.

 물론 새롭게 찾은 사랑이 상처 없이 계속될지는 확신할 수 없겠지만, 아무렴 어떤가. 사랑의 끝은 그 누구의 잘못도, 그 어떤 흠도 되지 않는 물결의 일부일 뿐이다. 그 어떤 과정을 거치든 각자의 사랑은 성숙해갈 것이다. 사랑은 늘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찾아오는 가을 같은 것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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