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의 여름, 은희와 지숙은 트램펄린에서 뛴다. 중학교 2학년의 두 소녀가 계속해서 뛰어오르는 모습이 벌새와 겹쳐 보인다. 그 꿀 몇 방울을 얻으려 1초에 수십 번의 날갯짓을 하는, 그렇게 공중에서 버텨보는 벌새. 그리고 날아오를 듯 발을 굴러 뛰어오르고 팔을 휘저어 보지만 곧 바닥에 떨어지고, 그럼에도 또다시 발을 구르는 아이들. 그리고 그 모습은 은희의 삶과도 닮아 있다. 좋은 일이 생길 듯, 그래서 날아오를 수 있을 듯하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나쁜 일이 생겨 추락한다. 그렇다고 추락한 채 영영 바닥에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나쁜 일들이 닥치지만, 이따금 좋은 일들도 생긴다. 그래서 은희는 날갯짓을 반복한다. 공중에 오래 머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은희는 귀 뒤에 생긴 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마친 후, 비몽사몽 한 채 간호사에게 간절하게 묻는다. "저기요... 내 혹은 어디 갔어요?"
혹이 생기기 전, 은희의 간절한 부름에 답해주는 이는 없었다. 때로는 잘못된 자리에 서서 상대방을 불렀기 때문이었고 또 때로는 상대방이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답이 돌아오지 않았을 때의 공허함. 열네 살 소녀가 그 공허함의 무게를 작은 날갯짓으로 버티기란 여간 지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그 무게는 버거울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그렇게도 절실하던 '타인의 관심'을 가져다준 그 혹은, 아이러니하게도 은희의 희망이었다.
목놓아 상대방을 부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는, 그런 나날을 보내면서도 은희는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손을 내민다. 매번 바닥에 고꾸라지면서도 또 한 번 그 보잘것없는 날갯짓으로 누군가를 향해 날아간다. 지완과의 관계, 그리고 유리와의 관계를 간신히 붙잡은 채 놓아야 할 때 놓지 못해 상처 입기를 거듭하는 은희의 감정선은 얼핏 개연성이 부족해 보이지만, 애초에 사람의 감정에 개연성 따위는 없는 법이다.
그런 은희의 날갯짓이 무색하도록 관계는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은희가 집어 든 책인 <크눌프>의 한 구절처럼, 우정과 사랑이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또 상식만천하 지심능기인(相識滿天下 知心能幾人)이라는 말처럼,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모르기에- 우리는 그 무게를 짊어진 채 무력한 날갯짓을 반복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 모든 것은 바람이 하는 일이니까-
"인간이란 누구나 자신의 혼을 가지고 있어 다른 이들의 영혼과 섞어 놓을 수 없다. 두 사람은 서로 가까이 이야기하고 함께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두 영혼은 식물과 같아서 각자의 영역에 뿌리를 박고 있기에 다른 곳으로 이동하거나 섞일 수 없다. 서로 가까이하기 위해 향기와 씨를 보낼 뿐이지. 이것이 적당한 곳으로 가게 하는 것은 바람이 하는 일이다."
그렇게 개연성 없는 감정을 향해 매번 손을 뻗던 은희에게 꿈처럼 영지가 나타난다. 은희가 다니던 한문학원의 새로운 선생님, 영지는 따뜻한 우롱차와 다정한 말들로 외로움에 지쳐있던 은희를 달랜다. 영지와 은희는 나이를 뛰어넘어 말도 안 되는 세상에 대해, 그리고 어찌할 수 없는 마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자기를 좋아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려. 내가 싫어지면 나는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해. 이런 마음이 있구나. 나는 지금 나를 사랑할 수 없구나. 힘들고 우울할 때 손가락을 봐. 그리고 한 손가락 한 손가락을 움직여 봐.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데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
매일같이 영지에게 줄 선물을 고민하고, 우울할 때면 영지에게 가고, 영지를 욕하는 원장에 맞서다 학원에서 쫓겨나고. 은희는 그만큼 영지를 동경하고 좋아했다. 영지는 은희에게 맞지 말라고, 누구라도 널 때리면 어떻게든 맞서 싸우라고, 절대로 가만있지 말라고 말해주던 유일한 사람이었고, 몇 번이고 무너진 인간관계에 겁먹은 채 '내가 불쌍해서 잘해주는 거냐'고 묻는 은희에 '바보 같은 질문에는 대답 안 해도 되지?'라고 해준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쩌면 영지는 은희가 몇십 번의 날갯짓으로 겨우 찾아낸 꽃이었을 것이다.
간신히 찾아낸 꽃을 향해 매초 날갯짓하던 은희의 마음은 영지의 죽음과 함께 또 한 번 추락한다. 성수대교와 함께, 강물 아래로.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데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다던 영지는 때 이른 죽음으로 손가락조차 마음껏 움직여보지 못한 채 져버린다. 두 소녀의 갈등에 어색해진 공기 속에서 대뜸 "노래 불러줄까?" 하고서는 '잘린 손가락'이라는 노래를 흥얼거리던, 영지의 떨리는 목소리가 떠올라 가슴이 저릿해졌다.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라는 말과 '잘린 손가락 바라보면서 소주 한잔 마시는 밤'이라는 가사 사이의, 마음 한 구석을 쿡쿡 찌르는 괴리감 때문이었다.
"잘린 손가락 바라보면서 소주 한잔 마시는 밤 덜걱덜걱 기계소리 귓가에 남아 하늘 바라보았네 잘린 손가락 묻고 오는 밤 설운 눈물 흘리는 밤 피 묻은 작업복에 지나간 내 청춘 이리도 서럽구나 하루하루 지쳐진 내 몸 쓴 소주에 달래며 고향 두고 떠나오던 날 어머님 생각하며 술에 취해 터벅 손 묻은 산을 헤매어 다녔다오 터벅터벅 찬 소주에 취해 헤매어 다녔다오"
영지는 더 이상 없는데, 소포는 남았다. 세상을 떠난 발신인이 세상에 남겨진 수신인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만이 남았다. 은희는 세상에 덩그러니 남겨진 채 손가락을 가만히 움직여본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 께 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성수대교가 무너졌음에도, 누군가의 생이 끝났음에도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돌아가고-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늘 그렇다.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좋은 일들이 함께 하고, 좋은 일들이 생기다가도 나쁜 일들이 순식간에 다가온다. 그리고 그 '좋은 일'들과 '나쁜 일'들은 깨어진 후에도 잔해를 남겨, 때로는 버팀목으로, 때로는 끈질기게 우리를 괴롭히는 칼날로 남는다. 일명 '콩가루 집안'이라는 그의 배경은 은희의 인생 속 칼날이, 남겨진 영지의 편지 한 장과 크로키북은 버팀목이 되어 남을 것이다.
그 1994년의 여름과 가을을 지나, 지금도 세상의 모든 은희는 그 모든 것들을 끌어안은 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결코 동정할 수도 없고, 동정해서는 안 되는 그런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인생이지만, '모든 은희들'을 비롯한 우리는 트램펄린 위에서 뛰듯, 또는 벌새가 날듯 계속해서 살아간다. 떨어질 걸 알면서도 뛰어올라 잠시 공중에 머물다 추락하고, 다시 한번 그 절실한 날갯짓으로 날아오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