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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삼오 Jul 31. 2020

우리는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김금희, <경애의 마음>

 연애소설에는 통 관심이 없는 내가 '빼어난 연애소설'이라는 소개에도 이 책을 읽게 된 건 '우리는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파괴되지 않았습니다'라는 문장 하나 때문이었다. 어딘가를 쿵 울리게 만든 그 문장 하나를 붙들고 읽어 내려가다 보니, 단순히 연애만을 다룬 소설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한 마디로 마음에 대한 책이었다. 마음을 섬세하게 다룬 책.
책 전체에 걸친 큼지막한 서사보다 경애와 상수의 대사 한 마디 한 마디, 그들의 마음을 조심스레 그린 문장 하나하나가 매력적이었다. 엄청난 기승전결이 있어 흥미진진함으로 독자를 단숨에 사로잡는다기보다는 잔잔함과 사려 깊은 문장으로 천천히 마음을 붙드는, 그런 책이었다.

 아버지와 형의 강압,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와 '언죄다' 페이지 운영 과정에서의 크고 작은 일들으로 힘들어하는 상수, 엄마의 암 투병과 산주에 대한 복잡한 마음으로 힘들어하는 경애, 그리고 그 둘이 공유하는 인천 호프집 화재사건과 E에 대한 아픈 기억. 그 무게의 버거움에 단단히 봉인되었던 두 마음은 천천히 봉인을 뜯어내고 '잘 지내기' 위한 발걸음을 내딛는다.


" 언니, 폐기 안 해도 돼요. 마음을 폐기하지 마세요. 마음은 그렇게 어느 부분을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우리는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언제든 강변북로를 혼자 달려 돌아올 수 있잖습니까. 건강하세요. 잘 먹고요, 고기도 좋지만 가끔은 채소를, 아니 그냥 잘 지내요. 그것이 우리의 최종 매뉴얼이에요."


 마음은 없는 셈 치거나 꽁꽁 봉인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 모든 마음은 '폐기되어서는 안 된다'. 이따금 자신의 마음 그 자체에 대한 원망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 때조차 우리는 스스로를 어르고, 부스러진 마음들을 모아 찬찬히 들여다보아야만 한다.

 어떤 일에는 '써본 적 없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런 마음들과 마주하는 시기, 우리는 나아가기보단 견뎌내야 하며, 그 시간은 지나가기보다는 녹아내릴 것이다. 견뎌내는 시간의 틈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듯 기척을 낸다면 또 하나의 마음이 만들어질 때라는 뜻. 문을 두드린 마음과 두드려진 마음이 만나 상처를 공유할 때 하늘은 조용히 밝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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