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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케이 Nov 08. 2024

그가 승리했다. 또 한 번

절망에 잠긴 미국의 지성인들

할 말이 없다. 동시에 넘치게 많다.

선거 다음날 아침, 엘에이는 놀랍도록 고요했다.

마치 엄숙한 분위기의 장례식장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평소와는 다르게 비통한 심정을 담아 "How are you?"를 물었다.

어떤 이들은 아예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옷을 입고 본인이 사랑하는 미국의 죽음을 추모했다.


도널드 트럼프.

당장 올해 성추문 입막음 의혹 재판에서 총 34개의 혐의 모두에 유죄 평결을 받은 그가, 2024 미국 대선에서 다시 한번 당선되며 미국 역사상 첫 중범죄자 대통령에 등극했다.

심지어 초박빙이었던 여론조사 결과와 달리 경합주 7곳에서 사실상 전승하며 전국 투표에서도, 선거인단 확보에서도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이는 일반적인 공화당, 민주당 간의 선거에서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이긴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 어느 누구도 아닌 트럼프가 이겼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다시 적지만 중범죄자이자, 공식적으로도 1) 여성/아동/성소수자를 향한 혐오발언2) 탈세/횡령/사기/채무불이행/사면권 남용 논란, 3) 심각한 외교적/군사적 무지 등의 행보를 보인 인물이다.

특히 본인은 스타이기 때문에 여자들의 몸을 마음대로 만지거나 (정확히 "grab them by the puxxy"(음부를 잡아도)라고 강조했다) 방송 백스테이지에서 옷 갈아입는 모습을 봐도 문제없이 빠져나갈 수 있다는 둥, 멕시코 이민자들은 마약상, 범죄자, 강간범이라는 둥, 아이티 이민자들은 개랑 고양이를 잡아먹는다는 둥 경악할 수밖에 없는 수위의 발언을 꾸준히 늘어놓았다. COVID-19 팬데믹 기간 동안에 아시아인을 향한 혐오를 조장하기도 했다. 정치 적수들을 향한 무자비한 인신공격은 말할 것도 없다. 오바마 전 대통령의 출생지 논란에 불을 지핀 것이 바로 그였다.

그의 발언들에 짙게 밴 혐오는 정책에도 직접적으로 반영되어 여성들의 생식권을 제한하고, 멕시코 국경의 장벽 건설을 완료하고, 대규모 추방을 단행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에게 표를 던진 사람들은 대부분 젊은 중산층/저소득층 노동자들로 그의 선동형 혐오 표현에 열광한 차별주의자들이나, 최소한 그가 이민을 강하게 규제하고 자국 경제를 활성화하는 데에 집중한다면 먹고사는 거야 나아지지 않겠냐는 생각을 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늘 정치인보다 사업가에 가까웠으며, 그가 권익을 보장하고자 하는 이들은 자국민 중에서도 부유층에 속하는 백인 남성이다.

2016년 대선 기간에도 뉴욕 월가나 워싱턴 DC의 케케묵은 기득권에 맞설 것처럼 보였던 그의 감세/로비 규제 정책은 막상 그가 당선되고 나자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내각에 지명한 인물들이야말로 월가의 부호들(스티브 므누신, 윌버 로스, 게리 콘), 최저임금 인상 반대론자(앤드루 퍼즈더), 석유회사 출신 지구온난화 회의론자(렉스 웨인 틸러슨) 등 공익에 맞서면서까지 기득권에 속하는 이들이었다. 심지어 렉스 틸러슨의 경우 그가 환심을 사려 든 석탄 업계 노동자들과 제대로 대립 관계에 있었는데, 트럼프는 한 발 나아가 천연가스 채굴(프래킹) 증가를 내세웠다. 석유나 천연가스 산업이 부흥하면 석탄 산업은 경쟁력이 더 떨어질 수밖에 없는데, 결국 본인에게 투표한 석탄 광부들을 우습게 보고 속인 것이나 다름없다.

생각해 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정작 트럼프 본인은 단 한 번도 노동자였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석유든, 천연가스든, 석탄이든 관련 산업을 부흥시켜 돈을 벌 수만 있다면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기후 변화 전체를 부인할 수 있는 비상식적인 기업인이다.


이번에 트럼프가 무턱대고 약속한 금리 인하, 인플레이션 종식도 실은 대통령에게 직접적인 권한이 주어지지 않은 부분이고, 부유층에게 유리한 감세 정책의 연장은 오히려 무리한 관세 정책(보편 10-20%, 중국산 60%)과 더불어 재정 적자를 부풀리고 소비자 가격 인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관세 정책의 경우 단순히 중국의 경제 성장률을 늦추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세계 경제 규모를 감소시켜 모두에게 피해를 줄 것이라는 게 국제통화기금(IMF)이 크게 우려한 부분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그토록 무자비하게 공격한 이민자들이 없다면 3D 업종이 크게 흔들려 지역 사회의 경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다.

경제 부문 외에도 당장 그를 탄핵 위험에 처하게 했던 러시아 게이트(러시아를 2016년 대선에 개입시키려 한 의혹 중심), 그리고 2021년 미국 국회의사당 점거 폭동(그의 유권자들이 선거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해 다수의 무기를 소지하고 국회의사당을 불법 점거한 사건)을 포함해서 심각한 문제가 많지만 요지는 다음과 같다.


미국이, 트럼프를 겪을 만큼 겪어놓고 또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토록 뻔뻔하게 유권자들 뒤통수를 칠 수 있는 인물이란 것을 다 확인하고도, 미국의 노동자들이 다시 한번 그에게 표를 던졌다. 심지어 여자들과 소수 인종들까지도. 위에 구구절절 적은 내용을 전부 무시하고 똑같은 이유로, "경제 부흥"을 기대하며.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절망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내 나라가 아닌데도 화병이 날 지경이다.

여성의 생식권을 조롱하는 내용의 "Your body, my choice"(네 몸이지만 선택은 나한테 달려있어)라는 표어가 유행 중이다 (출처: The Independent)
대학 학위가 없는 유권자 중 과반수가 트럼프에 투표했다 (출처: BBC)

교육자의 입장에서 특히 그렇다. 성범죄자이자 인종차별주의자인 작자가 대통령까지 됐는데 무슨 논리로 차별적인 발언을 하는 아이들을 징벌하겠는가? 실제로 트럼프가 당선되고 며칠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틱톡, X, 인스타그램을 포함해 다양한 온라인 공간에 흑인이나 여성을 대상으로 한 혐오 발언을 게시하는 이용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트럼프는 국민의 교육 수준이 떨어질수록 본인의 모순된 공약들과 문제들을 알아채지 못하고 자국 우선주의에 선동될 가능성이 높단 것을 알기 때문에, 무려 연방부 교육부의 해체를 약속했다. 특히 저소득층 학생, 성소수자 학생, 장애인 학생 등 취약 계층에 대한 지원을 줄일 것을 예고했다. 기존의 사립 대학들로부터 걷은 벌금으로 '애국자'들을 교사로 둔 공립 교육 기관을 설립하겠다는 계획은, 트럼프 본인이 주장한 대로 독재자나 할 법한 생각이다.


바로 올해 초까지 대학에서 저소득층 흑인, 히스패닉계 학생들을 지도하며 고등 교육으로의 전환 과정을 도우려 애쓴 입장에서 진심으로 가슴 아픈 소식이다. 아이들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이 "We want to make sure you feel like you are safe and that you belong here"("우리는 너희가 학교에서 안전하다고, 그리고 학교에 깊이 소속되어 있다고 느끼길 바라")였는데 이제 정반대의 정책을 펼치는 대통령을 두고 그런 말을 한들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나 또한 아시아인 국제 학생으로 미국에 처음 온 입장에서, 앞으로 이 나라에서 나의 안전과 사회적 신분 또한 어떻게 변할지 전혀 알 수 없다.

한 때 민주주의 모범국으로 불린 미국에서
흑인 남성들이 조지 플로이드 사건 때 백악관 벙커로 피신한 비겁한 전 대통령에게 투표했고,
히스패닉계 남성들이 본인들을 싸잡아 불법 이민자이자 예비 범죄자 취급한 인종차별주의자에게 투표했으며,
백인 여성들이 앞으로 어떤 이유로든 임신을 중단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어렵게 만들 성차별주의자에게 투표했다.

더 이상 국제 사회의 어느 주역도 자본주의적 가치보다 도덕적, 사회적 가치를 우선시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실은 그 자본마저도 본인들 앞으로 돌려주지 않을 지도자를 뽑는 데에서 교육의 한계를 보여주기까지. 정말, 정말 슬픈 역사의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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