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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 May 13. 2020

저는 예능PD 지망생입니다.

부드럽고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담는 사람이 되고 싶다



 봄이었다. 2학년이 되고는 처음 치는 영어 듣기평가에 긴장한 탓인지, 샤프를 쥔 손에 땀이 찼다. 막 시험을 마치고 정답을 맞춰볼 때쯤, 선생님께서 교실에 들어오셨다. 그리고 굳은 표정으로, 내 또래 친구들이 타고 있던 선박 한 척이 침몰했다는 소식을 전해주셨다. 그때 선생님의 표정만큼이나 가라앉았던 교실의 공기와 아이들의 벙찐 표정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살아 돌아오지 못한 동갑내기 친구들의 사진 속 미소도, 분향소에서 숨죽여 울던 옆 사람들의 눈물도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었다. 


 아이들의 죽음을 단순한 자연재난으로 덮으려는 사람들과, 정치적 공방으로 끈질기게 이어가려는 사람들이 국회와 법정과 언론 속에서 싸움을 키워갔다. 반면 한때 합동분향소 전광판을 수놓았던 추모 문자 행렬은 시간이 흐를수록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때 나는 마음으로 이들을 기억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스스로가 답답했다. 그래서 다짐했다. 내가 미래에 무슨 일을 하게 될지 알 수는 없지만, 어떤 사람이 되든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고. 


 그때부터 기록하기 시작했다. 기억은 변색될 수 있지만 기록은 영원히 남을 수 있었다. 글을 쓰다 좀 더 생생한 영상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몸도 마음도 점점 커가면서, 보이지 않았던 사회의 편린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기에 덧붙여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조악하게나마 카메라에 담아 편집을 해보기도 했다. 그 결과, 내가 만든 다큐멘터리가 공중파 프로그램에 상영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시청률은 1%도 되지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내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벅차올랐다.


 이제 나아가야 할 다음 단계는 어떻게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사람들은 어떤 프로그램에 이끌리는가. 당장 나의 경우에 대입해 보면, 결국 돌고 돌아 답은 재미였다. 일단 재미있어야 사람들은 반응하기 시작했고, 비로소 그 안에 담긴 내용에 집중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전하려는 메시지의 무게가 재미라는 명목하게 가벼워지는 것은 아닐지 우려가 됐다. 그런 고민에 잠식되어있을 무렵, 마냥 재미있고 유쾌한 것으로만 느껴졌었던 요즘의 예능 프로그램들에 눈길이 갔다.


 2020년 백상예술대상 예능 작품상 후보들을 살펴보니 특히 감회가 새로웠다. <놀면 뭐하니?>에서는 코로나19 때문에 힘들어하는 상인들을 위해 꽃을 구매하고, 외출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방구석 콘서트를 열어 준다. <내일은 미스터 트롯>에서는 대중문화에서 외면받았던 트로트를 국민 장르로 이끌어내, 온 세대의 사람들에게 음악을 통한 위로와 응원을 건넨다. <맛남의 광장>에서는 사람들에게 잊혀졌던 지역특산물들이 다시 사랑받을 수 있도록 요리법을 제시하고 구매를 독려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예능 프로그램들은 재미 속에서도 제법 묵직한 메시지를 건네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는 사람들 또한 프로그램이 건넨 메세지를 전해받을 마음이 열려 있음을 뜻할 것이다.


 사라져가던 것들을 다시 끌어오고, 가리워진 것들을 따뜻하게 비추는 힘. 예능 연출가에게는 바로 그 묵직한 힘이 있다. 이제 사람들은 예능 프로그램에 한없이 가벼운 재미만을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재미와 동봉된 어떤 메시지를 원한다. 다소 진지하고 딱딱할 수 있는 이야기도 부드럽게 만들고, 따뜻하게 전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 나는 재미와 메시지가 각각 양쪽에 놓인 천칭 가운데에 서기로 했다. 지나치게 재미에 치우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적절히 전할 수 있는 사람. 재미 속에서도 사람들에게 울림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프로그램을 즐겁게 보다가도, 문득 잊혀졌던 것을 사람들이 다시금 기억하게 만드는 예능 연출가가 되는 것. 그게 고등학교 2학년 시절 다짐했던 내 자신에게 떳떳할 수 있는 나의 꿈이자, 신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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