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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맨들기 Dec 31. 2021

라플라타 강의 전투 pt.05

남미에서 벌어진 유일한 전투


그라프 슈피는 통상파괴작전이 개시된 9월 26일부터 약 두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남대서양과 인도양 일대에서 영국 상선 9척을 수장시켰습니다. 연합국은 대서양과 인도양에 8개 부대를 파견해서 그라프 슈피를 추적했지만 그 넓은 대서양에서 신출귀몰하는 그라프 슈피를 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12월에 들어서자 그라프 슈피의 함장 한스 랑스도르프는 슬슬 독일로 돌아갈 채비를 합니다.

하지만 12월 7일에 침몰시킨 화물선 스트리언샬에서 발견된 문서가 랑스도르프의 구미를 자극했습니다.

문서에는 라플라타에서 영국으로 향하는 상선들의 정보가 빼곡히 담겨있었습니다.

랑스도르프는 마지막으로 남아메리카에서 크게 한탕하고 독일로 복귀하기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남아메리카 동부 해안을 담당하는 연합군의 Force G에는 총 4척의 순양함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중순양함 HMS 엑세터(HMS Exeter)

중순양함 HMS 컴벌랜드(HMS Cumberland)

경순양함 HMS 에이잭스(HMS Ajax)

그리고 뉴질랜드 소속의 경순양함 HMS 아킬레스(HMS Achilles)가 그것이었습니다.


고작 이 네 척의 순양함이 무려 5,000km에 달하는 남아메리카 동부 해안 전체를 커버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중순양함 컴벌랜드가 포클랜드에서 수리 중이었기 때문에 실제 Force G의 가용 전력은 3척뿐이었습니다.


도릭 스타의 침몰 소식이 전해졌을 때, Force G의 사령관 헨리 하우드 제독은 그라프 슈피가 추격대를 피해 남아메리카로 올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5,000km에 달하는 남아메리카 동부 해안 중 어느 곳에 그라프 슈피가 나타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지역은 리우데자네이루, 포클랜드 제도 그리고 라플라타 강이었습니다.


이중 하우드 제독이 주목한 곳은 라플라타 강이었습니다.

종종 하우드의 예상은 합리적인 추론이라기보다는 짬밥에서 나오는 촉으로 묘사가 됩니다.

그것이 추론이든 촉이든 간에 어쨋든 하우드의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습니다.


하우드는 그라프 슈피의 우선 목표가 상선 파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영국의 항공정찰은 상선들의 항로를 따라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라프 슈피는 정찰기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전투 당일에 항공정찰을 전혀 할 수 없었습니다.

공교롭게도 독일과 영국 모두가 전투 직전에 항공정찰의 덕을 전혀 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양측은 다소 예기치 못한 타이밍에 갑자기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 숨바꼭질은 끝났다


1939년 12월 13일 05:30분경. 

정작 상대를 먼저 발견한 것은 추격을 당하던 그라프 슈피 쪽이었습니다.

영국 함대는 몬테비데오 동쪽 해상에서 14knot의 속도로 항해 중이었습니다.

랑스도르프는 이들이 순양함 1척과 구축함 2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에이잭스와 아킬레스는 정말 순양함처럼 생기지 않았습니다.


HMS 에이잭스 (HMS Ajax)
HMS 아킬레스 (HMS Achilles)


그라프 슈피는 영국군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랑스도르프는 순양함 한 척만 박살 내면 나머지 구축함 두 척은 알아서 달아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착각이 랑스도르프에게는 불운이었습니다.

곧 그들이 구축함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이미 달아나기에는 늦은 타이밍이었습니다.

그라프 슈피는 영국 순양함보다 느렸고 항해 능력 또한 좋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오랜 작전으로 그라프 슈피의 엔진은 최고 속도가 23knot까지 떨어진 상황이었습니다.

만약 가시거리 내에서 추격전이 벌어진다면 따라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였습니다.

랑스도르프는 싸우기로 결심했습니다.


06:10, 에이잭스의 견시가 320° 방향에서 연기를 발견합니다.

06:14, 하우드 제독은 연기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중순양함 엑세터를 324° 방향으로 이동시켰습니다.

그동안 경순양함 에이잭스와 아킬레스는 엑세터의 후방에서 여전히 14Knot의 속도로 항해 중이었습니다.

06:16, 엑세터로부터 "포켓 전함인 것 같다."라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영국이 드디어 그라프 슈피를 발견했습니다!


06시 16분경 각 함의 이동 상황


먼저 포문을 연 것은 그라프 슈피였습니다.

06:18, 그라프 슈피의 11인치 주포 6문이 일제히 포격을 개시했습니다.

초탄이었음에도 그라프 슈피의 포탄은 엑세터와 불과 100여 m 떨어진 수면에 착탄했습니다.


모든 배들이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습니다.

하우드는 그라프 슈피의 화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함대를 둘로 갈랐습니다. 에이잭스와 아킬레스는 340°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동쪽에서 접근했고 엑세터는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그리고 엑세터가 06:20에, 아킬레스는 06:21, 에이잭스는 06:23에 각각 포격을 개시했습니다.


잠시나마 하우드의 계획이 먹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양방향에서 달려드는 영국군을 상대하기 위해 그라프 슈피의 화력이 분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엑세터의 일제사격이 그라프 슈피를 위협하자, 그라프 슈피는 곧 모든 주포를 엑세터에게 집중했습니다.


06:23, 그라프 슈피가 세 번째 일제사격을 가했습니다. 그중 한 발이 엑세터의 우현 중앙 근처 수면에 떨어졌습니다. 이 충격으로 우현 어뢰발사관의 승조원들이 전사하고 통신망, 탐조등, 월러스 비행정(Walrus Mk.I) 등이 손상되었습니다.



06:24, 엑세터는 그라프 슈피를 향해 8인치 주포 8발을 발사했습니다.

이중 한 발이 그라프 슈피의 연돌 바로 아랫부분에 명중했습니다. 이 포탄은 무려 두 개 층을 뚫고 들어가 선내에서 폭발했습니다. 

또 다른 포탄은 배 앞부분 수면에서 폭발하여 선수와 전방 포탑이 손상을 입었습니다. 장갑이 얇은 그라프 슈피의 약점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1939년 12월 17일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항구에 정박한 그라프 슈피. 측면의 파편 흔적을 자세히 볼 수 있다.


그라프 슈피가 네 번째 일제사격을 가했을 때, 포탄 두발이 엑세터에 명중했습니다.

한 발은 다행히 선체를 그대로 관통하여 바다에 떨어졌지만 나머지 한 발은 엑세터의 B 포탑을 때렸습니다.

포탑은 작동 불능이 되어버렸고 동시에 엄청난 파편이 엑세터의 함교를 덮쳤습니다.

이 포격으로 벨 함장과 다른 2명을 제외한 함교 인원 전원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붉은 원이 피격 위치인 B 포탑


엑세터는 통제력을 잃고 우현으로 돌기 시작했습니다. 벨 함장은 후방 함교로 자리를 옮겨 지휘를 이어나가려 했으나 함내 통신이 모두 두절된 상태였습니다. 함장은 급한대로 병사들을 줄지어서 명령을 전달했습니다.

배는 명령을 전달받은 어뢰 담당 장교 스미스 소령(Lt Com C.J. Smith)에 의해 겨우 서쪽 되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엑세터는 11인치 두발을 더 얻어맞았습니다.


06:30, 에이잭스와 아킬레스는 그라프 슈피와의 거리를 빠르게 좁혀나갔습니다.

에이잭스와 아킬레스가 계속해서 함포를 쏘아대자 그라프 슈피는 더 이상 엑세터만을 상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는 수없이 그라프 슈피는 두 개의 11인치 포탑 중 하나를 에이잭스와 아킬레스를 향해 돌렸습니다.


06:31, 11인치 포탑 하나와 다수의 부포들이 에이잭스와 아킬레스 향해 발포되었습니다.

두 척의 경순양함 주위에 물기둥이 솟아올랐지만 명중탄은 없었습니다. 에이잭스와 아킬레스는 살짝 방향을 틀어 그라프 슈피의 포화에서 벗어납니다.


11인치 함포를 발사하는 그라프 슈피 일러스트


06:32, 엑세터가 우현 어뢰를 발사했지만 어뢰는 모두 빗나갔습니다.

06:34, 에이잭스와 아킬레스는 다시 좌현으로 방향을 틀어 그라프 슈피와의 거리를 좁혀나갔습니다.

이때 두 배 모두 전속력으로 항진 중이었습니다. 사거리가 짧은 5.9인치 주포를 가진 두 배는 어떻게 해서든 그라프 슈피와 거리를 좁혀야 했습니다.


HMS 아킬레스의 5.9인치 주포. 앞쪽의 사람과 비교하면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작다.


06: 37, 그라프 슈피는 연막을 치고 침로를 좌현으로 약 150° 변경하여 북서쪽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대로 항로를 유지했다가는 에이잭스와 아킬레스의 T자전법에 걸려 두들겨 맞을게 뻔했기 때문입니다.

랑스도르프는 자신에게 조금 더 유리한 위치에서 싸우고자 방향을 바꾼 것입니다.



이 무렵, 에이잭스의 캐터펄트에서 씨폭스(Fairey Seafox) 정찰기가 사출되었습니다. 정찰기 덕분에 하우드 제독은 조금 더 정밀하게 전장 상황을 살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무선 설정 지연으로 첫 항공 보고는 06:54이 되어서야 수신되었습니다.


06시 37분경 각 함의 이동 상황


06:40, 엑세터는 좌현 어뢰를 발사하기 위해 우현으로 크게 선회하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아킬레스의 사격통제실(DCT) 바로 옆 수면에 그라프 슈피의 11인치 충격신관 포탄이 떨어졌습니다. 덕분에 DCT는 벌집이 되었습니다. 이 충격으로 DCT의 승조원 4명이 죽고 다수의 인원이 부상당했습니다. 비록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사격통제실(DCT) 자체는 크게 손상을 입지 않아 몇 분 후 계속해서 임무를 이어나갔습니다.


사격 통제 타워 (DCT: Director Control Tower)

함포 사격 통제 시스템의 일부.
바람, 기온, 탄도 등 여러 요인을 고려하여 표적의 방위를 측정한다.
DCT는 관측이 용이한 높은 곳에 위치한다.


파편에 손상을 입은 HMS 아킬레스의 사격 통제 타워 (DCT)


경순양함들과 거리를 벌린 그라프 슈피는 공격의 칼날을 다시 엑세터에게로 집중했습니다.


06:43, 엑세터는 북동쪽으로 항해하며 그라프 슈피를 향해 좌현 어뢰를 발사했습니다.


06:45, 에이잭스는 다시 그라프 슈피를 따라잡기 위해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아킬레스도 곧 에이잭스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러는 동안 엑세터는 그라프 슈피로부터 11인치 두발을 추가로 얻어맞았습니다. 포탄 중 하나는 선체 중앙에 떨어져 화재와 침수를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전방의 두 개 포탑은 완전히 작동을 멈추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라프 슈피가 고폭탄만 쓰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이때, 그라프 슈피가 철갑탄을 썼다면 엑세터는 침몰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고폭탄 (HE: High Explosive Shell)
목표 외벽에서 폭발하여 폭압과 파편으로 살상효과를 내는 포탄

철갑탄 (AP: Armour Piercing Shell)
장갑을 관통한 후 적함 내부에서 폭발하도록 고안된 포탄

(당시 엑세터의 인원들은 철갑탄이 날아오지 않는 것을 다행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전투 후에 그라프 슈피의 포술장은 엑세터에게 철갑탄을 쓰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고 합니다.)


06:46, 아킬레스의 사격통제 무선에 이상이 발생했습니다. 

개별적으로는 포반과 연락이 가능했으나 모든 포반에게 일괄적으로 명령을 전달할 수 없었습니다. 이 말은 더 이상 정확한 일제사격을 가할 수 없게 되었다는 의미였습니다.


사격 중인 HMS 아킬레스의 X포탑과 Y포탑


06:50, 엑세터는 서쪽으로 항해하며 포화를 주고받았지만 그라프 슈피와의 거리는 점점 벌어졌습니다.

엑세터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배는 우현으로 7°나 기울었고 11인치 함포의 피격으로 여러 구획이 침수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포탑은 고작 한 개만 작동 가능한 상태였습니다.


06:56, 에이잭스는 북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곧이어 아킬레스도 침로를 변경했습니다.


07:08, 에이잭스와 아킬레스는 다시 한번 포격을 시작했습니다. 

이때 그라프 슈피와의 거리는 17,000야드(15.5km)였습니다.


07:10, 에이잭스와 아킬레스는 그라프 슈피와의 거리가 16,000야드(14.6km)에 이르자 급격히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07:16, 그라프 슈피가 연막을 치더니 좌현으로 급격히 선회했습니다. 

만신창이가 된 엑세터를 끝장내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자 에이잭스와 아킬레스가 엑세터를 구하기 위해 달려들었습니다. 그라프 슈피는 11,000야드(10km) 거리에서 에이잭스에게 협차를 가했습니다. 이때 그라프 슈피의 5.9인치 부포들도 불을 뿜었습니다.


07시 16분경 각 함의 이동 상황


협차사격

전함 포술의 하나.
일제 사격이 표적의 전후좌우에 걸치게 사격한 후, 사방에 떨어진 포탄의 좌표값을 계산하여 표적의 좌표값을 알아낸다.


07:20, 에이잭스와 아킬레스는 모든 포를 쏠 수 있도록 우현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그리고 그라프 슈피의 선체 중앙에서 화재가 목격되었습니다.

그라프 슈피와의 거리는 약 16,000야드(10km). 

에이잭스와 아킬레스는 그라프 슈피와의 거리를 야금야금 좁혀나갔습니다.


07:21, 그라프 슈피는 에이잭스와 아킬레스의 예상 경로에 G7 어뢰 한 발을 발사했습니다.

원래는 우현 어뢰 4발을 모두 발사할 생각이었지만 교전 중 입은 피해 때문에 나머지 발사관은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라프 슈피 후방의 어뢰발사기. 좌우 측에 발사기가 하나씩 있고 발사기 하나당 4기의 어뢰를 탑재하고 있다.


07:25, 그라프 슈피에서 날아든 11인치가 에이잭스의 X 포탑을 직격했습니다.

11인치 지연신관 포탄은 여러 구획을 뚫고 들어간 후, 포탑 기부를 부수고 그 아래 위치한 하우드 제독의 침실에서 폭발했습니다. 동시에 파편이 Y 포탑의 바벳을 때리는 바람에 Y 포탑도 작동 불능이 되었습니다. 이 한 번의 공격으로 에이잭스의 X 포탑과 Y 포탑이 무력화되었고 1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바벳 (barbette)

포탑 아래 위치한 원통형 장갑 부분. 그 위에 포탑이 설치된다.


하우드도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에이잭스는 우현으로 선회하여 9,000야드(8.2km) 거리에서 어뢰 4발을 발사했습니다.

그라프 슈피는 다시 연막을 피우고 좌현으로 130° 정도 선회했지만 약 3분 후 다시 북서쪽으로 침로를 변경했습니다.


07:28, 에이잭스와 아킬레스는 약 280° 방향으로 선회하여 그라프 슈피와 거리를 좁혔습니다.


손상을 크게 입은 엑세터는 조금씩 뒤처지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엑세터는 그라프 슈피를 향해 포격을 지속했습니다. 하지만 07:30경, 침수로 인해 Y 포탑의 전원이 끊어졌고, 엑세터는 더 이상 포격을 지속할 수 없었습니다.


07시 30분경 엑세터의 모든 주포가 침묵하였다.


07:31, 정찰기로부터 보고가 수신되었습니다.


    "Torpedoes approaching, they will pass ahead of you." 

    "어뢰 접근 중, 어뢰는 함선 앞으로 지나갈 것 같다."


그라프 슈피가 07:21에 발사한 어뢰였습니다.

하우드는 추가로 다가올 어뢰를 대비하여 뱃머리를 180° 방향으로 돌렸습니다. 어뢰가 다가온 방향이었습니다. 옆구리에서 다가오는 어뢰보다 정면에서 다가오는 어뢰가 피하기 쉬웠기 때문입니다.

에이잭스는 그라프 슈피를 우현에 두고 교전을 이어갔습니다. 이번 기동으로 양측의 거리는 급격하게 줄어들었습니다.


07:32, 그라프 슈피가 또다시 연막을 피웠습니다.

그라프 슈피는 에이잭스와 아킬레스의 포화를 피하기 위해 연막 속에서 방향을 서쪽으로 바꾸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라프 슈피의 전방 포탑과 후방 포탑에 연달아 포탄이 떨어졌습니다. 장갑이 거의 없다시피한 그라프 슈피였지만 다행히 포탑만큼은 장갑을 두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장갑이 없는 갑판에 떨어진 포탄은 여지없이 화재로 이어졌습니다. 영국 순양함의 계속된 공격에 그라프 슈피의 피해가 조금씩 쌓여갔습니다.


07:36, 그라프 슈피는 남서쪽으로 방향을 틀고 모든 화력을 에이잭스와 아킬레스에게 집중합니다.


07:38, 그라프 슈피의 일제사격에 에이잭스의 무선 안테나가 파괴되었습니다. 

이제 양측의 거리는 8,000야드(7.3km)까지 좁혀졌습니다. 이때 에이잭스의 탄약은 20%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X 포탑과 Y 포탑에 이어 B 포탑마저 작동 불능에 빠졌습니다. B 포탑의 호이스트가 말썽을 일으켜서 탄약을 제대로 공급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에이잭스에서 가동 가능한 주포는 A포탑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그라프 슈피의 사격은 여전히 매서웠습니다.



하우드 제독은 더 이상 주간작전을 이어가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07:40, 하우드는 일몰 후 다시 따라잡기로 결정하고 함대의 방향을 동쪽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엑세터는 남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에이잭스의 탄약 부족은 81분 동안 사격을 지속했던 A 포탑만의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커뮤니케이션 오류로 이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07:42, 에이잭스와 아킬레스는 연막을 치고 동쪽으로 침로를 변경했습니다. 하지만 그라프 슈피는 따로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라프 슈피는 침로 270°방향을 유지한 채, 22knot 속도로 라플라타 강을 향해 꾸준히 나아갔습니다.


07:45, 이렇게 라플라타 강 전투의 첫 번째 단계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추격전입니다.


07:46, 에이잭스와 아킬레스는 여전히 연막 속에 있었습니다. 에이잭스와 아킬레스는 다시 방향을 바꿔 그라프 슈피를 뒤쫓기 시작했습니다.


08:07, 하우드는 무선을 통해 주변 영국 상선들에게 그라프 슈피의 위치 및 항로 등을 알렸습니다.

(이때, 경고 무선은 아킬레스를 통해 이루어졌다. 에이잭스의 안테나가 아직 복구가 안되었기 때문이다.)

경고 무선은 추격전이 끝날 때까지 매시간 반복되었고 같은 내용이 10:17과 17:00에 영국 해군성에도 전달되었습니다.


09:12, 에이잭스가 정찰기를 회수했습니다.


09:46, 하우드는 포클랜드에 있는 HMS 컴벌랜드(HMS Cumberland)에게 최대한 빨리 라플라타로 오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급박한 상황 속에서 명령이 뒤죽박죽이었기 때문에 컴벌랜드는 12시가 다 되어서야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10:00 정각, 아킬레스가 그라프 슈피의 속도를 과대평가하는 바람에 23,000야드(21km) 거리까지 접근해버렸습니다.


그리고 5분 후, 그라프 슈피가 갑자기 돌아서서 일제사격을 가했습니다. 첫 번째 일제사격은 매우 짧았지만 두 번째는 거의 근접한 거리에 떨어졌습니다. 아킬레스는 재빨리 연막을 피우고 뒤로 물러났습니다.


목표를 조준하고 있는 그라프 슈피의 전방 주포. 1939년 12월 13일 라플라타 강의 전투 당일의 모습이다.


11:04, 그라프 슈피 근처에서 상선(영국 상선 SS 셰익스피어)이 목격되었습니다. 

그라프 슈피는 에이잭스에게 


    "please pick up lifeboats of English steamer."

    "영국 상선의 구명정을 수용하시오"


라는 무전을 송신했니다. 상선을 공격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페이크였습니다. 상선의 구명정들은 여전히 호이스트에 매달려 있었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11:05, 하우드는 엑세터로부터 모든 포탑이 작동 불능이고 14번 격벽까지 침수되었지만 여전히 18knot로 항해할 수 있다는 무선을 받았습니다. 하우드는 엑세터에게 포클랜드로 돌아가라고 명령했습니다.


13:40, 엑세터는 하우드로부터 포클랜드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수신하고 15:10에 뱃머리를 남쪽으로 돌렸습니다.


그라프 슈피는 라플라타 강으로 향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13:47, 하우드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영국 해군무관에게 그라프 슈피가 라플라타 강으로 향하고 있다고 알렸습니다. 이후 한동안 별다른 충돌 없이 추격이 이어졌습니다.


19:15, 그라프 슈피가 진로를 변경하더니 에이잭스를 향해 두 차례 일제사격을 가했습니다.

첫 번째 사격은 크게 빗나갔지만 두 번째 사격은 에이잭스가 지나간 항적 위에 정확히 떨어졌습니다. 이때 두 배 사이의 거리는 약 26,000야드(23.7km)였습니다.


일몰 직후, 그라프 슈피가 이번에는 아킬레스를 향해 세 차례 일제사격을 가했습니다. 

이에 아킬레스는 5번의 일제사격으로 대응했습니다.


그라프 슈피의 11인치 전방 주포 발사 장면. 아래 가로로 비스듬히 놓인 Bar는 양안합치식 거리측정기.


그라프 슈피는 21:32에 또 한 번 아킬레스를 향해 일제사격을 가했습니다.

사격은 21:40과 21:43에도 가해 왔으나 이는 단지 거리를 벌리기 위한 위협사격쯤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아킬레스는 위협에 굴하지 않고 22:00 무렵에는 그라프 슈피에서 5마일 떨어진 거리까지 접근하였습니다.


이제 그라프 슈피가 몬테비데오로 향하는 것은 자명해 보였습니다.

23:50, 하우드 제독은 추격을 멈추었습니다. 대신 에이잭스와 아킬레스는 라플라타 강 입구를 틀어막고 감시에 들어갔습니다.


그라프 슈피는 방코 잉글레스(banco inglés) 북쪽을 지나 00:50에 몬테비데오에 도착했습니다.


방코 잉글레스(banco inglés)

라플라타 강어귀에 위치한 모래톱으로 둘러싸인 수중 암석


이 전투로 그라프 슈피에서는 36명 숨지고 60명이 부상당했습니다.

랑스도르프 본인도 파편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피격으로 함체에 구멍이 난 그라프 슈피. 구멍 밖으로 몬테비데오 항구와 민간 상선의 모습이 보인다.
포탄에 구멍이 뚫린 그라프 슈피의 전방 구조물
뼈대만 남은 그라프 슈피의 함재기 Ar 196


에이젝스에서는 7명이 전사하고 5명이 부상당했습니다.

아킬레스는 4명이 전사하고 함장 에드워드 페리(Edward Parry)가 부상당했지만 셋 중 가장 적은 피해를 기록했습니다.


다리에 파편상을 입은 HMS 아킬레스의 에드워드 페리 (Edward Parry) 함장
HMS 아킬레스의 부상자들. 육지로 이송하기 위해 보트로 옮기는 중이다.
HMS 아킬레스에서 전사자들의 가족을 위해 모금을 하는 모습. 이는 해군의 오랜 전통이었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엑세터였습니다.

엑세터는 그라프 슈피의 11인치 주포를 7발이나 얻어맞았습니다.

그 바람에 전사자는 무려 61명에 달했고 부상자도 23명이나 되었습니다.


파괴된 HMS 엑세터의 전방 주포. 뒤로는 파편을 뒤집어쓴 함교의 모습도 보인다. 라플라타 강의 전투를 상징하는 사장 유명한 사진 중 하나이다.
함교에서 바라본 전방 주포의 모습
1940년, 수리를 위해 영국 플리머스 항구에 도착한 HMS 엑세터. 전투 후 파편의 흔적이 선명히 남아있다.


1939년 12월 13일의 전투는 이렇게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양상의 전투가 막 시작될 참이었습니다.




[영화로 알아보는 전쟁사] 남미에서 벌어진 유일한 전투! 그라프 쉬페 사냥! #라플라타강의전투 pt.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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