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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맨들기 Dec 26. 2021

라플라타 강의 전투 pt.04

이상한 전함, 포켓전함 그라프 슈피!!


- 라플라타 강

빗금 친 부분 전체가 라플라타 강이다


남미 국가들은 푼타 메다노스(Punta Medanos)에서 푼타 델 에스테(Punta del Este)에 이르는 라플라타 강 전체를 영해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영어로는 La Plata River 또는 영국식으로 River Plate라고 표기합니다. 

라플라타 강은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 사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몬테비데오는 강 하구에 위치하고 있고, 조금 더 안쪽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있습니다. 

라플라타 강 전투는 화살표 방향으로 조금 더 간 곳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림에서 보시다시피 이게 강인가 싶을 정도로 강폭이 대단히 넓습니다. 가장 넓은 하구의 폭은 무려 220km에 달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강 폭도 50km나 됩니다. 

하구가 이 정도로 벌어지면 중간에 섬이라도 몇 개 생기기 마련인데 여긴 섬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보면 마치 만이나 바다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마젤란이 이곳을 탐험할 때 해협인 줄 알고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 나온 적도 있습니다.







- 그라프 슈피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영국은 독일 수상함들을 자국 함대에 편입시키기로 결정합니다. 하지만 독일 해군은 영국의 조치에 반발하여, 자신들의 함대를 스스로 자침 시켰습니다. 


스캐퍼플로 독일 대양함대 자침 사건 (Scuttling of the German fleet in Scapa Flow) 1919년 6월 21일


이 사건으로 독일 해군의 자긍심은 살아남았지만, 한때 세계 2위를 자랑하던 독일의 대양함대는 바닷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1928년, 장갑함 계획이 승인되었을 때까지도 독일 해군의 비전은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는 쪼그라진 해군을 육군에 부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강력한 대양 해군의 재건을 주장했습니다.

이런 논의가 이어진 이유는 그놈의 베르사유 조약 때문이었습니다.


베르사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 1919년 6월 독일제국과 연합국 사이 맺은 제1차 세계 대전의 평화협정


1차 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은 베르사유조약에 따라 배수량 1만 톤 이상의 대형 함정을 보유할 수 없었습니다. 주포는 11인치 이하만 탑재가 가능했고 주포의 사거리는 30km 이하로 제한되었습니다.

군함에는 '대응 방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군함의 장갑은 자신이 가진 화포와 비슷한 수준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배수량 1만 톤 안에서 11인치 주포와 대응 장갑을 모두 갖춘 배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당시 전함의 표준이라고 할 수 있는 드레드노트급 전함 보유가 사실상 금지된 겁니다.


드레드노트급 (Dreadnought class): 20세기 초, 전함의 표준 모델. 노급전함(弩級戰艦)이라고도 한다. 드레드노트로 인해 거함거포주의가 본격적으로 태동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일은 과감한 선택을 합니다.

장갑을 포기했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도이칠란트급 장갑함이었습니다. 

순양함급 배수량에 순양함급 속도를 갖추고, 전함급 화력을 가졌지만 장갑은 거의 없는... 이상한 녀석이었습니다. 꼼꼼히 뜯어보면 더 이상합니다.

순양함급 속도를 갖추었다고 하지만 당시 영국 순양함보다 7노트 정도 느렸습니다.

전함급 화력이라는 것도 같은 시기 다른 나라 주력 전함들에 비하면 부족한 수준이었습니다.

게다가 너무 많은 장비를 탑재했기 때문에 항해 능력도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바다 상태와 상관없이 롤과 피치가 심했습니다.


롤 (Roll): 이동방향과 평행한 축으로 회전하는 것 / 피치 (Pitch): 피치는 이동방향과 수직인의 축으로 회전하는 것



항해 중에는 뱃머리에서 파도가 너무 크게 일어서 아래쪽 함교에서는 시야 확보가 어려울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도이칠란트급 장갑함은 당시 독일이 베르사유조약에 위배되지 않으면서 보유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독일은 이 녀석을 장갑함으로 분류했지만 영국 언론은 이 녀석에게 포켓 전함이라는 귀에 쏙 박히는 별명을 지어주었습니다. 포켓 전함, 그러니까 도이칠란트급 장갑함은 총 3척이 만들어졌습니다.

1번 함 도이칠란트

2번 함 어드미럴 셰어

그리고 마지막 3번 함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어드미럴 그라프 슈피였습니다. 

도이칠란트급 장갑함은 노후한 전노급 전함들을 대체하면서 한때 독일 해군 최강의 전투함으로 자리매김하는 듯했습니다.


전노급 전함 (Pre-dreadnought): 드레드노트 출현 이전에 만들어진 전함. 드레드노트로 인해 이전에 만들어진 전함들은 빠르게 도태되었다


하지만 1935년에 영국-독일 해군조약이 체결되면서 사실상 독일 해군의 건조 제한이 풀리게 됩니다.


영국-독일 해군조약 Anglo-German Naval Agreement

히틀러가 베르사유 조약 파기를 선언하자 영국이 히틀러와 맺은 조약
독일 해군의 총 톤수가 영국 해군의 35%를 넘지 않는다는 내용


독일이 더 큰 함선을 만들 수 있게 되자, 도이칠란트급은 빠르게 일선함의 지위를 잃어갔습니다. 대신 도이칠란트급에게는 새로운 역할이 주어졌습니다. 바로 지난 영상에서 다루었던 통상파괴임무였습니다.






- 한스 빌헬름 랑스도르프


랑스도르프는 1894년 3월 20일 독일 뤼겐 섬(Rügen)의 베르겐(베르겐 아우프 뤼겐 Bergen auf Rügen)에서 태어났습니다.

4년 뒤, 가족은 뒤셀도르프(Düsseldorf)로 이주하였는데, 이웃에 무려 독일 해군의 영웅인 막시밀리안 폰 슈피 백작(Graf Maximilian von Spee)이 살고 있었습니다.



Graf(백작) Maximilian von Spee. 그라프 슈피의 함명은 이분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저명한 이웃의 영향을 받은 랑스도르프는 해군 사관학교에 입학합니다. 그리고 후에는 저명한 이웃의 이름을 딴 배(어드미럴 그라프 슈피)의 함장이 됩니다.


그라프 슈피 함장 한스 빌헬름 랑스도르프 (Hans Wilhelm Langsdorff)


랑스도르프는 실전능력과 행정능력을 두루 갖춘 유능한 인물로 평가받았습니다. 부하들에게도 인기가 높았고 심지어 영국인 포로들조차 그의 인품과 능력을 인정할 정도였습니다. 완전 엄친아였습니다. 


게다가 나치 신봉자도 아니었습니다. 장례식 사진을 보면 다른 사람들은 나치식 경례를 하고 있는데 반해 랑스도르프는 손바닥을 드러낸 해군 경례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영화에서도 표현되었습니다.


영화 '라플라타 강의 전투'(1956) 중 한 장면


랑스도르프에 대한 기록을 보면 유독 그의 인품에 대한 언급이 많습니다.

중립국 함선을 공격하지 않은 점,

포로들을 대피시킨 후 배를 침몰시킨 점 등을 들어

랑스도르프의 인품을 설명합니다. 


하지만 이는 당시 독일 해군의 나포 규정이었습니다. 출동 전에 독일 해전지휘부는 나포 규정을 엄격히 준수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는 그라프 슈피와 같은 시기에, 북대서양에서 활동했던 장갑함 도이칠란트의 예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도이칠란트 장갑함(Panzerschiff Deutschland): 도이칠란트 장갑함의 1번함 도이칠란트


1939년 10월 14일, 도이칠란트는 노르웨이 수송선 로렌츠 W 한센(Lorentz W Hansen)을 침몰시키고 선원들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물론 배는 선원들을 대피시킨 후에 침몰시켰습니다. 그리고 같은 날, 덴마크 증기선 콩스달(Kongsdal) 호를 정선시켰지만 콩스달 호의 목적지가 중립국임이 확인되자 나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전에 붙잡았던 로렌츠 W 한센 호의 선원들을 콩스달 호에 태워 중립국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랑스도르프의 대처 방식과 동일합니다. 


그라프 슈피가 9척의 영국 상선을 침몰시키는 동안, 도이칠란트는 2척을 침몰시키고, 1척을 나포했습니다. 당연히 도이칠란트는 3척 모두 그라프 슈피와 같은 방식으로 처리했습니다. 


물론, 해전지휘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라프 슈피와 함께 활동했던 군수지원함 알트마르크의 선장인 하인리히 다우(Heinrich Dau)는 포로들을 야박하게 대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단순히 포로들을 야박하게 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나포 규정을 위반하는 행위까지 저지릅니다.


군수지원함 알트마르크 (German tanker Altmark)


라플라타 강 전투 이후 독일로 복귀하게 된 알트마르크는 노르웨이 영해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노르웨이 어뢰정들이 알트마르크를 정선시켰습니다. 알트마르크가 중립국인 노르웨이 영해 안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경우에는 포로들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다우 선장은 포로들을 풀어주지 않으려고 그들을 갑판 아래에 숨겼습니다.

그 바람에 이를 알고 출동한 영국군과 교전이 일어났고 다우 선장은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후에야 포로들을 석방했습니다. 확실히 도이칠란트나 랑스도르프와의 경우와는 달랐습니다.


교전 중 전사한 알트마르크 승조원들이 해원으로 이송되고 있다


랑스도르프의 캐릭터는 그라프 슈피에 포로로 잡혔던 패트릭 도브의 기록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엄격한 규율주의자였던 랑스도르프는 부하들에게 포로들을 공정하고 동등하게 대하라고 명령했다.
덕분에 보급품이 부족할 때조차, 영국 포로들은 독일 선원들과 같은 식사를 제공받았다.

Langsdorff was a strict disciplinarian aboard the Graf Spee, he enforced fair and equal treatment. British prisoners received the same food as the German crewmen, even when supplies ran low.


랑스도르프는 날씨가 추워지자 여름옷밖에 없는 도브 선장에게 모직 옷을 지어 주었습니다. 도브가 자신의 배에서 탈출할 때 담배 파이프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자, 담배 파이프를 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압류한 개인 물품은 후에 찾아갈 수 있게끔 꼼꼼하게 영수증도 발행했습니다. 랑스도르프가 유독 도브 선장에게만 특별한 대우를 해준 것은 아닙니다. 패트릭 도브는 기록을 남겼고 다른 사람들은 따로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 뿐입니다. 


패트릭 도브는 석방 후 가진 인터뷰에서 "랑스도르프는 싸워야 할 때는 자비가 없지만 싸우지 않을 때는 훌륭한 신사였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랑스도르프의 신사적인 태도와 영국이 입는 피해는 전혀 별개의 문제였습니다. 





[영화로 알아보는 전쟁사] 이상한 전함, 포켓전함 그라프 슈피!! #라플라타강의전투 pt.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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