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치 미 이프 유 캔!! 그라프 슈피 추격전!!
1939년 9월 3일 당시 영국과 독일의 해군 전력 비교
위 표는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1939년 9월 3일, 양국의 해군 전력을 비교한 것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영국의 전력이 압도적입니다. 독일의 경우, 이 시기에는 아직 전함조차 없었습니다.
비스마르크 취역: 1940년 8월 24일
티르피츠 취역: 1941년 2월 25일
항공모함과 수상기모함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예 장비조차하지 못했습니다.
재미있는 부분은 잠수함입니다.
보통은 독일의 유보트 숫자가 영국을 압도했을 것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전쟁 초기에는 오히려 영국이 독일보다 많은 잠수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전쟁 전체를 통틀어보면 독일이 영국보다 많은 잠수함을 생산한 게 맞습니다.
이런 명백한 열세에도 불구하고 독일 해군은 전쟁 초기부터 적극적인 공세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이 전략은 최소한 전쟁 중반까지는 꽤 효과가 있었습니다.
2차대전이 발발하기 약 열흘 전인 1939년 8월 21일.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그라프 슈피는 독일 빌헬름스하펜 항구를 떠나 남대서양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사흘 후인 8월 24일에는 도이칠란트급 1번 함인 도이칠란트가 그린란드 남부로 향했습니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습니다.
이틀 후인 9월 3일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합니다. 그리고 이튿날 9월 4일, 영국은 독일 봉쇄령(Blockade of Germany)을 발표하고 북해를 틀어막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2척의 장갑함과 16척의 유보트가 대서양으로 빠져나간 뒤였습니다.
이 무렵 그라프 슈피는 카보베르데 제도 서쪽에서 조용히 남하하고 있었다.
이들의 임무는 적국 상선들을 타격하는 이른바 통상파괴전을 수행하는 것이었습니다.
통상파괴전 (Commerce raiding, 通商破壞戰)
적국의 해상 무역을 방해하기 위해 군함이 아닌 민간 상선 등을 공격하는 전략
그라프 슈피가 수행했던 통상파괴 임무는 흔히 알고 계시는 유보트가 수행했던 임무와 동일한 임무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라프 슈피는 수상함이어서 유보트에 비해 적에게 발각될 위험성이 높았습니다.
하지만 독일은 오히려 이점을 역이용합니다.
수상함들이 많은 수의 연합군 호위함들을 유인할수록 대서양의 유보트들은 보다 자유롭게 작전을 수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라프 슈피의 함장, 한스 랑스도르프는 통상파괴임무를 수행하면서 동시에, 가능한 한 많은 수의 적함을 자신 쪽으로 끌어들여야 했습니다. 게다가 몇 가지 제한사항도 따라붙었습니다.
그는 프랑스 선박이 아닌 영국 선박만을 공격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가능한 한 적함과의 교전은 피하라는 명령도 받았습니다.
모든 배들은 나포 규정에 따라 수색해야 했고, 침몰시키기 전에는 선원과 승객들을 대피시켜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미국을 자극할만한 그 어떤 사고도 일으키지 않아야 했습니다.
결코 만만한 임무가 아니었습니다.
그라프 슈피는 9월 8일에 이미 적도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통상파괴작전에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히틀러가 폴란드를 점령한 후, 영국, 프랑스와 평화 협상을 원했기 때문에 해상에서의 통상파괴작전을 곧바로 승인하지 않았던 겁니다. 해전지휘부로부터 명령이 하달된 날짜는 전쟁이 시작된 지 거의 한 달이 다 되어가는 9월 26일이었습니다. 명령이 떨어지자 랑스도르프는 남아메리카 연안을 자신의 첫 번째 사냥터로 정했습니다.
랑스도르프는 그라프 슈피에 프랑스 국기를 게양하고 함명은 동급함인 '도이칠란트'나 '어드미럴 셰어' 등으로 수시로 변경했습니다. 혹여나 누군가에게 목격되더라도 잘못된 함명으로 혼란을 야기하고 제보의 신뢰성을 떨어뜨리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9월 30일 정오 무렵, 그라프 슈피에서 발진한 아라도 정찰기가 첫 번째 사냥감을 발견합니다.
브라질 페르남부쿠의 헤시피 항에서 남동쪽으로 70 마일 떨어진 지점에서 항해 중인, 화물선 클레멘트(SS Clement)였습니다. 클레멘트는 정찰기를 보자마자 재빨리 "RRR"이라는 무선 신호를 보냈습니다.
RRR
적에게 공격받고 있다
(I am under attack by a raider)
무선 신호를 눈치챈 아라도 정찰기가 곧바로 경고사격을 가했고 클레멘트는 더 이상 무선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랑스도르프는 독일군 나포 규정에 따라 클레멘트의 선원들을 대피시킨 후 배를 침몰시켰습니다. 그리고 클레멘트의 선장과 기관장은 포로로 삼고, 나머지 47명의 선원들은 4대의 구명정에 나눠태워 브라질로 돌려보냈습니다.
여담으로 그라프 슈피는 클레멘트를 침몰시키기 위해 무려 어뢰 두 발과 30발의 포탄을 쏟아부었습니다. 심지어 어뢰 두 발은 빗나갔습니다. 클레멘트는 5,000톤 급으로 그다지 큰 배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클레멘트를 침몰시키는데 꽤나 애를 먹은 겁니다. 이 일이 있은 후 랑스도르프는 포격보다는 주로 폭탄을 설치해서 상선들을 침몰시켰습니다.
클레멘트를 침몰시킨 그라프 슈피는 연합군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뱃머리를 아프리카로 돌렸습니다.
다음날 클레멘트의 선원들이 브라질에 도착하자, 남대서양에 나타난 독일군에 대한 소문이 들불처럼 번져나갔습니다.
10월 5일 오전 6시 30분, 그라프 슈피가 수평선 너머에서 피어오르는 증기선의 연기를 포착합니다.
시에라리온에서 옥수수를 싣고 런던으로 향하던 화물선 뉴턴 비치(Newton Beech)였습니다. 그라프 슈피는 프랑스 국기를 달고 접근하여 아센시온 섬에서 남동쪽으로 약 500마일 떨어진 해상에서 뉴턴 비치를 나포합니다. 뉴턴 비치는 나포 직전에 조난신호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클레멘트와 달리 뉴턴 비치가 보낸 신호는 "SOS" 조난신호였습니다.
랑스도르프는 연합군 함정들이 이 신호에 크게 반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합니다. 실제로 영국 순양함 HMS 컴벌랜드가 뉴턴 비치의 조난신호를 수신했지만 컴벌랜드는 뉴턴 비치의 SOS가 일반적인 해상사고라고 판단하여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랑스도르프는 나포한 뉴턴 비치를 곧바로 침몰시키지 않고 한동안 포로수용선으로 이용합니다.
같은 날, 영국과 프랑스는 그라프 슈피를 사냥하기 위한 추격대를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대서양에 일곱, 인도양에 하나, 총 8개의 부대가 편성되었고, 부대를 구성하기 위해 항공모함 4척, 순양전함 3척, 순양함 16척 등 총 23척의 함선이 동원되었습니다. 랑스도르프는 그라프 슈피에 프랑스 국기를 게양하고 함명은 동급함인 '도이칠란트'나 '어드미럴 셰어' 등으로 수시로 변경했습니다. 혹여나 누군가에게 목격되더라도 잘못된 함명으로 혼란을 야기하고 제보의 신뢰성을 떨어뜨리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10월 7일, 그라프 슈피의 정찰기가 또다시 상선을 발견합니다.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서 시에라리온 프리타운까지 설탕을 운반하던 화물선 애쉴리아(Ashlea)였습니다.
애쉴리아는 그라프 슈피가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국기를 게양하고 다가오는 그라프 슈피를 프랑스 순양전함 됭케르크라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애쉴리아는 워낙 순식간에 당했기 때문에 기밀문서도 제대로 파기하지 못했습니다. 기밀문서 중에는 영국 해군성이 상선들에게 제공한 코드북(암호장)도 들어있었습니다.
랑스도르프는 선원과 보급품을 노획한 후 배를 침몰시켰습니다.
다음 날인 10월 8일에는 포로들을 수용하기 위해 사용하던 뉴턴 비치도 침몰시킵니다.
뉴턴 비치가 그라프 슈피와 함께 움직이기에는 너무 느렸기 때문입니다.
뉴턴 비치에 수용 중이던 포로들은 그라프 슈피로 옮겨졌습니다.
10월 10일에는 리버풀로 향하던 또 다른 화물선 헌츠맨(Huntsman)을 나포했습니다.
헌츠맨 또한 그라프 슈피를 프랑스 군함으로 착각했습니다. 뒤늦게 알아차린 헌츠맨의 통신장(radio Officer)이 조난신호를 보냈지만 랑스도르프는 당황하지 않고 헌츠맨의 무선망을 이용하여 다시 무선을 보냈습니다.
'여기는 뉴턴 비치. 적 잠수함으로부터 공격받고 있다'
거짓 무선이었습니다.
거짓 무선에 연합군이 속는다면 그들은 이미 침몰한 뉴턴 비치의 항로를 뒤지며 시간을 허비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연합군은 그라프 슈피가 남아메리카 연안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랑스도르프의 거짓 무선으로 그라프 슈피의 정확한 위치가 노출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공격 위치가 아프리카 항로 어딘가라는 것은 알려진 것입니다.
그라프 슈피의 전과가 늘어날수록 추격대가 그라프 슈피를 쫓을 수 있는 단서도 함께 늘어났습니다.
헌츠맨의 승조원은 84명이나 됐습니다.
그라프 슈피는 이미 이전에 붙잡은 포로들로 만선이었습니다. 헌츠맨의 그 많은 인원들을 전부 수용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는 수없이 그라프 슈피는 헌츠맨을 이끌고 랑데부 지점으로 이동합니다.
10월 15일, 그라프 슈피는 랑데부 지점에서 군수지원함 알트마르크(Altmark)를 만나 연료를 보급 받았습니다.
그라프 슈피는 8월 21일 독일 빌헬름스하펜 항구를 떠난 이래 단 한 번도 항구에 정박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보급은 일반 유조선으로 위장한 군수지원함 알트마르크를 통해 해결했습니다.
전쟁 초반만 하더라도 연합국은 독일처럼 대형 군수지원함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연합군 입장에서는 해상에서 끊임없이 지원받으며 신출귀몰하는 그라프 슈피를 쫓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음 날인 10월 16일, 헌츠맨도 랑데부 지점에 도착했습니다.
헌츠맨에 타고 있던 포로들은 알트마르크로 이송되었고 속도가 느린 헌츠맨은 그날 밤 침몰되었습니다.
충분한 보급을 받은 그라프 슈피는 다시 아프리카 서안으로 접근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미 대서양 일대에 그라프 슈피의 악명이 널리 퍼진 후라 상선을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10월 21일, 아라도 정찰기가 드디어 영국 상선 트리베이언(Trevanion)을 발견합니다.
다음날 그라프 슈피는 트리베니언을 따라잡아 침몰시켰습니다.
10월 23일에도 정찰기가 상선을 발견했지만 이번에는 따라잡는데 실패합니다.
이즈음 랑스도르프는 남대서양에서는 더 이상 사냥이 어렵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에 베를린의 레더 제독이 새로운 사냥터를 제안합니다.
인도양이었습니다.
호주는 한창 양모를 수확할 때였고, 그럴 때면 희망봉-호주 교역로는 항상 상선들로 가득 찼습니다. 게다가 그 일대는 방어도 허술했습니다. 그라프 슈피는 10월 28일에 알트마르크로부터 연료를 보급 받은 후, 인도양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희망봉-호주 무역로는 텅 비어있었습니다. 5일 동안 주변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해 호주의 양모 채취시기가 늦게 찾아오는 바람에 화물선들이 호주 항구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던 겁니다.
하는 수 없이 랑스도르프는 아프리카 해안과 마다가스카르 사이에 있는 모잠비크 해협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상선을 발견할 수는 없었습니다.
11월 15일, 가까스로 상선 하나를 발견합니다. 영국의 소형 유조선 아프리카 쉘(Africa Shell)이었습니다.
그라프 슈피가 정선 명령을 내렸지만 아프리카 쉘은 정선 명령을 무시하고 달아났습니다. 아프리카 쉘은 그라프 슈피에서 날린 포탄이 자신의 뱃머리 앞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제서야 배를 멈추었습니다. 랑스도르프는 아프리카 쉘의 선장을 포로로 삼고 선원들은 풀어주었습니다.
아프리카 쉘의 선장 패트릭 도브(Patrick G. G. Dove)는 그라프 슈피가 라플라타 강 전투를 치르고 1939년 12월 14일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 도착할 때까지 그라프 슈피에 포로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그 경험을 바탕으로 저서 '나는 그라프 슈피의 포로였다'(I Was Graf Spee's Prisoner)를 출간하였습니다.
다음날 랑스도르프는 또 다른 배들을 발견했지만 중립국 선박임을 확인하고 모두 돌려보냈습니다. 인도양은 그라프 슈피에게 큰 성과를 가져다주지 못했습니다. 아프리카 쉘이 유일한 성과였습니다. 랑스도르프는 아쉬움을 안고 다시 대서양으로 향했습니다.
대서양으로 돌아온 그라프 슈피는 11월 26일에 알트마르크와 다시 접선합니다. 이 무렵 그라프 슈피는 거의 30,000해리(56,000km) 이상을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라프 슈피는 연료를 보급 받고 엔진을 점검하는 데 4일을 보냈습니다.
보급품을 보충하는 동안, 그라프 슈피는 이전보다 더 교묘하게 자신을 위장했습니다.
목재와 캔버스를 이용해서 전방에 가짜 포탑을 설치하고 함재기 캐터펄트 뒤에는 가짜 굴뚝도 만들었습니다.
사진에서 보시는 2번 포탑이 나무와 캔버스로 만든 더미 포탑입니다.
랑스도르프는 그라프 슈피의 실루엣이 HMS 리나운(Renown)처럼 보이길 원했습니다.
자료 사진을 보면 이렇게 정찰기 날개 하면에 프랑스군 마킹이 그려져 있습니다.
수직미익의 스와스티카는 지워지고,
기체 측면의 발켄크로이츠(막대 십자)는 이런 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처음에는 당연히 제대로 된 독일군 마킹을 가지고 있었겠지만 이 무렵에는 날개 상면에만 발켄크로이츠가 유지되었습니다.
이즈음 랑스도르프는 이제 슬슬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병사들은 지쳤고, 그라프 슈피도 도크 안에서 제대로 된 정비를 받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해상에서의 보급과 정비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랑스도르프는 먼저, 영국-희망봉 항로를 공격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연합군 추격대가 아프리카 연안으로 모여들면, 자신은 거꾸로 남아메리카로 이동한 뒤, 안전하게 독일로 복귀할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복귀하는 도중에도 영국 상선을 만난다면 가차 없이 나포할 것입니다.
12월 2일, 그라프 슈피는 양모와 냉동고기를 싣고 영국으로 향하던 화물선 도릭 스타(Doric star)를 공격했습니다. 도릭 스타는 침몰했지만 침몰 직전에 구조 무선을 보냈습니다.
도릭 스타가 보낸 구조 무선은 애매한 SOS 신호가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이 적 전함에게 공격받고 있다는 구체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이 무선은 이후 그라프 슈피와 전투를 치르게 될 영국의 하우드 제독이 자신의 함대를 라플라타 강으로 집결시키는 근거가 됩니다.
12월 3일에는 또 다른 화물선 타이로아(Tairoa)를 침몰시켰습니다.
이즈음 랑스도르프의 기록을 보면
"통상파괴임무가 거의 끝나가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적함과의 교전을 피할 이유가 없다."
라고 쓰고 있습니다. 랑스도르프는 적이 쫓아오더라도 사거리가 긴 그라프 슈피의 주포가 상대를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2월 6일, 그라프 슈피는 알트마르크와 다시 만나 연료와 식량을 보급 받았습니다.
12월 7일 저녁에는 마지막 희생자인 화물선 스트리언샬(Streonshalh)을 침몰시켰습니다. 독일군은 스트리언샬에서 기밀문서 하나를 입수합니다. 라플라타 강과 영국 사이를 항해하는 상선들의 정보가 빼곡히 담긴 문서였습니다.
먹잇감을 눈앞에 두고 그냥 갈 수는 없었습니다.
랑스도르프는 남아메리카 해안을 따라 복귀하겠다는 원래 계획을 바꾸어 라플라타 강으로 향했습니다. 정보대로라면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화려한 전과를 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무렵에는 그동안 유지하던 가짜 포탑이나 굴뚝 등도 제거되었습니다.
가짜 포탑은 실제 포탑을 운용하는 데 방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을 모두 제거했다는 것은 더 이상 교전을 피하지 않겠다는 뜻이었습니다.
12월 12일과 13일, 그라프 슈피는 정찰기가 고장 나는 바람에 항상 해오던 항공 정찰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라프 쉬페가 향하는 그곳에서는 영국군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사냥꾼이 사냥감이 될 차례였습니다.
그라프슈피 그라프슈페 그라프쉬페 Grafspee 그라프 슈피 그라프 슈페 그라프 쉬페 Graf sp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