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프 슈피는 왜 자침했을까? 그라프 쉬페의 최후
1939년 12월 14일 자정 무렵
그라프 슈피는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항구에 닻을 내렸습니다. 영국 경순양함 에이잭스와 아킬레스도 추격을 멈추었습니다. 그라프 슈피가 중립국 항구로 들어간 이상, 전투를 이어나갈 수는 없었습니다.
하우드 제독은 에이잭스와 아킬레스를 라플라타 강 바깥 해협의 북쪽과 남쪽에 각각 배치했습니다. 그라프 슈피를 코너에 몰아넣은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새로운 양상의 전투가 시작될 것입니다.
새벽에 독일 공사 오토 랑만(Otto Langmann)이 그라프 슈피를 찾았습니다. 랑만은 아르헨티나로 가지 않은 랑스도르프를 질책했습니다. 우루과이가 중립국이라고는 하지만 영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친영 국가였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아르헨티나는 독일계 이민자들이 많은 친독 국가였습니다.
그라프 슈피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우루과이 정부도 바빠졌습니다. 독일, 영국, 프랑스 공사가 차례로 우루과이 외무장관 알베르토 구아니(Alfredo Guani)를 찾았습니다.
문제는 헤이그 협약의 해석에 있었습니다.
헤이그 협약에 따르면 교전 중인 군함은 중립국 항구에 단 24시간만 체류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체류시간을 어긴다면 중립국은 해당 선박을 억류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해당 군함이 '하바리'를 주장할 경우, 중립국은 선박의 수리가 완료될 때까지 군함을 강제로 추방할 수 없었습니다.
하바리(Havarie)
선박 사고
단, 하바리가 인정될 경우에도 오로지 항해에 필요한 수리만 가능했습니다. 전투와 관련된 일체의 수리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독일은 그라프 슈피가 약 2주간의 수리가 필요하다며 하바리를 주장했습니다. 반면 영국은 그라프 슈피가 전투 후 몬테비데오까지 300마일을 문제없이 항해했으므로 하바리는 인정되지 않으며 이는 독일이 몰래 전투 장비를 수리하려고 꼼수를 부리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라프 슈피와 같은 도이칠란트 장갑함들은 동일한 구조적 결함을 안고 있었습니다. 이 무렵 거대 함선들은 추진기관으로 증기터빈을 썼습니다. 증기터빈은 강한 힘을 낼 수 있었고 대형화에도 적합했습니다. 구조도 간단해서 경제성과 신뢰성도 뛰어났습니다.
하지만 그라프 슈피는 증기터빈을 쓸 수 없었습니다. 증기터빈은 꽤 괜찮은 추진체계이지만 덩치가 크고 무거운 물건입니다. 그리고 그라프 슈피는 베르사유 조약의 배수량 1만 톤 건조 제한을 준수해야 했습니다. 그라프 슈피가 증기터빈을 단다면 배수량 1만 톤 커트라인을 지키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독일은 디젤기관을 달기로 결정했습니다. 디젤 기관은 당시 막 등장한 따끈따끈한 신기술이었습니다. 그라프 슈피는 MAN 社가 만든 M9Z 42/58 디젤엔진을 좌우에 2개씩, 총 4기를 장착했습니다.
디젤엔진은 증기터빈에 비해 작고 가벼웠지만 출력은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높았습니다.
하지만 단점도 있었습니다. 선박용 디젤연료는 상온에서는 점도가 높아서 그대로 엔진에 공급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라프 슈피는 연료탱크와 엔진 사이에 설치된 중간 탱크에서 연료를 가열하여 점도를 떨어뜨린 후, 엔진에 연료를 공급했습니다.
그런데 중간 탱크와 연결된 보일러 파이프는 얇은 철판만 두른 채 갑판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하필 그곳에 5.9인치 포탄이 떨어진 겁니다. 그래서 그라프 슈피는 더 이상 연료를 가열할 수 없었습니다. 핵심적인 바이탈 파트였지만 함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충분한 방호를 하지 못했던 겁니다.
그라프 슈피의 엔진 4기는 아래와 같이 배치되었습니다.
그리고 측면에는 5인치 장갑 벨트가 둘러져 있었습니다.
그림을 보시면, 측면 장갑 벨트는 엔진 위 장갑 갑판과 이렇게 이어져있습니다.
장갑이 없는 갑판에 있던 파이프가 피격되었다고 하니까, 피격 위치는 붉은 원으로 표시된 지점이 아니었을까 추정해 봅니다. 피격 위치는 순전히 저의 추측입니다. 정확한 도면을 구하지 못해, 글과 일러스트만 보고 추측한 것이기 때문에 틀릴 수 있습니다.
이미 가열이 끝난 연료는 16시간 분량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 분량이면 귀국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전투 한번 치르기도 힘든 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라프 슈피는 실제로는 하바리를 주장할 만한 피해를 입었지만 피해 내용이 군사기밀에 속하는 바람에 이를 제대로 주장할 수 없었던 겁니다.
2주간의 수리를 주장하는 독일과 24시간 후 추방해야 한다는 영국의 주장이 팽팽히 맞섰습니다.
우루과이는 자신들이 그라프 슈피의 손상을 직접 검사한 후 결정하겠다고 통보했습니다. 그리고 영국에는 1914년 코로넬 해전 당시 영국 순양함 글래스고(HMS Glasgow)가 하바리를 주장하고 중립국 브라질에서 일주일을 보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습니다. 더 이상 징징대지 말란 뜻이었습니다.
사실 우루과이는 독일과 영국의 주장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우루과이 대통령 알프레도 발도미르(Alfredo Baldomir)는 우루과이의 가장 큰 교역 파트너인 영국과 껄끄러워지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동시에, 우루과이 내 독일계 국민들에게 원성을 사는 것 또한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루과이는 표면적으로는 완전한 기계적 중립을 취하는 듯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이미 영국 쪽으로 완전히 기운 상태였습니다.
날이 밝자 국제법에 따라 그라프 슈피에 갇혀있던 포로들이 석방되었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그라프 슈피의 피해를 파악하기 위한 우루과이 측 전문가들이 승선하였습니다. 독일은 어떻게 해서든 2주간의 체류허가를 받아내려고 노력했지만 사실 이 조사는 독일의 체류허가를 거부하기 위한 요식행위에 불과했습니다. 이대로라면 그라프 슈피는 24시간 안에 몬테비데오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라프 슈피를 항구에서 내쫓으려는 영국의 작전이 거의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라플라타 강 하구에서 진을 치고 있던 하우드 제독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하우드는 그라프 슈피가 며칠 더 몬테비데오 항구에 머무르기를 바랐습니다. 하우드는 현재 자신이 가진 전력으로는 그라프 슈피를 완전히 제압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화력의 중심인 엑세터는 이미 대열에서 이탈하였고 에이잭스는 화력의 50%를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아킬레스의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탄약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포클랜드에서 중순양함 컴벌랜드가 증파되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확실한 전력이 될 순양함 리나운(HMS Renown)과 항모 아크 로열(HMS Ark Royal)은 5일 뒤에나 도착할 예정이었습니다.
하우드는 충분한 전력이 모일 때까지 그라프 슈피를 항구에 묶어두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우드 제독은 영국 공사 밀링턴-드레이크에게 그라프 슈피의 체류연장을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사용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가능한 모든 수단
Every means possible
지금까지 밀링턴-드레이크는 그라프 슈피를 항구에서 내쫓을 궁리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정반대로, 어떻게 해서든 그라프 슈피를 항구에 묶어두어야 했습니다.
영국은 헤이그 협약을 다시 꺼내들었습니다. 그라프 슈피를 내쫓기 위해 이용되었던 헤이그 협약이 이번에는 그라프 슈피를 붙잡는데 이용됩니다. 헤이그 협약에 따르면 교전국 상선이 중립국 항구를 벗아날 경우, 같은 항구에 있던 상대편 군함은 24시간 동안 항구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영국 상선이 출항하면 그라프 슈피는 24시간 동안 몬테비데오를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는 군함으로부터 민간 상선을 보호하기 위한 조항이었습니다.
밀링턴-드레이크는 먼저, 영국 상선 애쉬워스(SS Ashworth)가 15일 18:00에 몬테비데오에서 출항하도록 조치했습니다. 헤이그 협약대로라면 16일 18:00까지 그라프 슈피를 몬테비데오에 묶어둘 수 있었습니다.
밀링턴-드레이크는 알베르토 구아니 외무장관에게 영국 상선의 출항 사실을 알리고 헤이그 협약에 따라 우루과이 정부가 그라프 슈피의 출항을 막아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영국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지만 구아니 외무장관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우루과이는 영국 편이었습니다.
우루과이 측 전문가들의 조사가 끝난 후, 우루과이 정부가 그라프 슈피에게 허락한 체류시간은 72시간뿐이었습니다. 그라프 슈피는 12월 17일 일요일 20:00 가 되기 전에 항구를 떠나야 했습니다.
같은 시각, 그라프 슈피의 승조원들은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영국의 방해로 몬테비데오의 조선소와 현지 회사들은 그라프 슈피의 지원 요청을 전부 거부했습니다.
독일은 급한 대로 우루과이 내 독일 출신 노동자들과 항구에 정박 중이던 독일 상선 2척으로부터 민간 선원들을 지원받아 수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에서 온 몇몇 기술자도 수리에 동원되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랑스도르프와 소수의 인원들은 몬테비데오 북부 외곽에 마련된 묘지를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 전사한 독일 병사들을 위한 장례식이 열렸습니다. 장례 행렬이 이어졌고 수많은 인파가 이 모습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장례식에는 이례적으로 바로 전날 그라프 슈피에서 석방된 영국인 선원들이 참석했습니다.
참석자들이 전사한 장병들을 향해 마지막 경례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나치식 경례를 할 때, 랑스도르프는 전통적인 해군 경례로 전사한 부하들을 애도했습니다.
영국은 일단 그라프 슈피를 항구에 묶어두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이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그라프 슈피가 항구를 벗어난다면 또다시 전투가 벌어질 것입니다. 당시 하우드는 그라프 슈피의 연료 계통 트러블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라프 슈피의 전력을 실상보다 높게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라프 슈피가 연료 계통의 문제가 없었다면 제법 선전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그라프 슈피는 까다로운 상대였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그라프 슈피를 항구에 묶어두기 위해 두 가지 공작을 벌입니다.
하나는 가짜 정보를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은 보안이 허술한 전화선을 통해 연합국 함대가 이미 우루과이 근해에 도착했다는 내용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이게 제대로 먹힙니다. 가짜 뉴스가 우루과이 석간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실렸습니다.
다른 하나는 전날 영국 상선을 출항시켰던 것처럼 24시간마다 영국 상선을 출항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랑스도르프는 해가 지면 어둠을 틈타 달아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독일 본국의 결정이 늦어지고, 더불어 영국이 15일 18:00에 상선을 출항시키는 바람에 꼼짝없이 항구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그리고 영국은 16일 18:00에 또다시 상선을 출항시켰습니다. 영국의 공작으로 그라프 슈피가 항구를 떠날 수 있는 시간은 17일 18:00에서 20:00 사이, 단 두 시간으로 제한된 것입니다.
독일은 계속해서 우루과이 정부에 체류연장을 요청했지만 우루과이 정부의 입장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제 랑스도르프에게는 세 가지 선택지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대로 우루과이에 억류되거나, 외해로 나가서 다시 전투를 벌이거나, 아니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향하는 것이었습니다.
친영 정부가 들어서 있는 우루과이에 배가 억류된다면 그라프 슈피는 결국 영국의 손에 넘어갈 것입니다. 독일 공사 오토 랑만은 '억류'를 최악의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억류될 바에는 차라리 자침하는 편이 낫다고 여겼습니다.
그렇다고 전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이미 영국이 흘린 가짜 정보에 속은 독일은 사실상 전투를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가짜 정보에 속지 않았다 하더라도 연료 처리 시스템의 문제가 발목을 잡았을 것입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향하는 것 또한 쉽지 않았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려면 수심이 얕은 라플라타 강을 거슬러 올라가야만 했습니다. 게다가 영국군이 따라붙을 것입니다. 라플라타 강 안에서 교전이 일어난다면 외교 문제가 되겠지만 대영제국은 그런 일에 신경 쓰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로 하우드 제독은 라플라타 강 안에서의 전투를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랑스도르프는 패배가 확실한 싸움에 부하들을 몰아넣고 싶지 않았습니다. 탈출로는 봉쇄당했고 더 이상 대항할 수단도 없었습니다.
16일 밤, 결국 그라프 슈피의 수리 작업이 중단되었습니다. 대신 그라프 슈피의 선내는 작은 폭발과 망치질 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기밀문서는 소각되었고 깃발과 슈피 백작의 초상화 등은 외교행낭에 실려 육지로 보내졌습니다. 화기와 주요 부품들은 꼼꼼히 파괴되었습니다. 전방과 후방의 11인치 포탑에는 폭탄이 설치되었습니다. 포탑 내부에 어뢰 신관을 설치하고 주위에는 장약을 잔뜩 쌓아올렸습니다. 엔진실에도 어뢰가 놓였습니다. 그리고 기폭장치에는 타이머가 설치되었습니다.
12월 17일 일요일
아침부터 항구에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라프 슈피와 영국의 대결을 기대하며 몰려든 인파였습니다. 해변에는 라디오 스튜디오가 마련되었고, 몬테비데오의 상황은 라디오를 통해 전 세계로 생중계되었습니다.
하우드 제독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그라프 슈피의 인력과 장비가 독일 화물선 타코마(Tacoma)로 옮겨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18:30, 그라프 슈피가 닻을 올렸습니다.
랑스도르프는 승조원 40명과 함께 그라프 슈피를 이끌고 항구를 벗어났습니다. 그라프 슈피는 당시 우루과이의 영토 경계선인 3마일 밖에서 방향을 서쪽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준설된 해협을 빠져나와 닻을 내렸습니다.
기폭장치의 타이머가 20분으로 설정되었고 곧이어 배를 버리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랑스도르프는 선원들이 안전하게 대피했는지를 확인한 후, 장교 5명과 함께 그라프 슈피를 빠져나왔습니다.
19:56, 그라프 슈피의 엔진실에 설치한 어뢰 탄두가 폭발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엄청난 폭발은 그라프 슈피의 선체를 갈기갈기 찢어놓았습니다. 후방 포탑이 날아가면서 선미가 잘려나갔고 화염이 하늘 높이 올랐습니다. 전방 포탑은 폭발하지 않았습니다. 최초 폭발로 인해 기폭장치와 연결된 전선이 손상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라프 슈피는 상부구조물을 수면 위로 드러낸 채 얕은 강바닥에 주저앉았습니다. 불길이 함 전체를 뒤덮었습니다. 그라프 슈피의 화재는 이후 이틀 동안이나 이어졌습니다. 랑스도르프는 항해일지에 "1939년 12월 17일 20:00 그라프 슈피 운항 중단"이라는 마지막 기록을 남겼습니다.
랑스도르프와 승조원들은 아르헨티나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아르헨티나 정부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아르헨티나 언론은 전투를 회피한 랑스도르프를 겁쟁이라고 공격했습니다. 심지어 왜 배와 함께 죽지 않았냐는 비난까지 들어야 했습니다.
12월 19일 저녁, 랑스도르프는 부하들을 만났습니다. 그는 부하들에게 언론의 내용은 사실이 아니며, 자신이 최후의 일전을 벌이지 않은 이유는 무의미한 희생을 막기 위한 결정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날 저녁, 랑스도르프는 숙소에서 장교들과 함께 늦은 시간까지 어울렸습니다. 자정 다 되어서 홀로 방으로 돌아온 그는 시가에 불을 붙이고 잔에는 스카치위스키를 따랐습니다. 그리고 아내, 부모님, 독일 대사에게 각각 편지를 썼습니다. 랑스도르프는 편지를 봉인한 뒤, 프로이센 국기로 몸을 감싸고 자신의 머리에 권총을 쏘았습니다.
다음날 오후, 랑스도르프의 장례식이 열렸습니다.
장례식에는 그라프 슈피의 승조원들과 아르헨티나 장교들이 참석했습니다. 그라프 슈피의 포로였던 애쉴리아호의 선장도 영국 선원들을 대표해서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 정부는 그라프 슈피의 승조원들을 전원 억류했습니다.
전투에서는 대등하게 싸웠지만 외교에서는 독일의 참패였습니다. 영국 대사관은 현장 인원들이 적절한 권한을 가지고 유연하게 대처했지만, 독일 공사 오토 랑만은 상황을 주도하지 못하고 오로지 경직된 자세로 일관했습니다.
사실, 독일 외교의 실패를 오토 랑만에게만 묻기에는 다소 가혹한 면이 있습니다. 당시 두 나라의 외교력 차이는 두 나라의 해군력 차이만큼이나 현격했습니다.
아르헨티나는 독일과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국민 정서는 반영국, 친독일 성향을 띠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미국과 영국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르헨티나 정부는 오히려 정치적으로는 철저히 중립을 유지했습니다. 아르헨티나가 그라프 슈피의 승조원들을 억류한 이유는 이런 사정 때문이었습니다. 경제력을 바탕으로 펼치는 영국의 외교를 독일은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한동안 아르헨티나는 추축국과 관계를 단절하지 않은 유일한 남미 국가로 남아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에서 일어난 '1943년 혁명' 이후에는 아르헨티나마저 연합군에 합류합니다.
그라프 슈피는 총 9척의 영국 상선을 침몰시켰습니다. 물질적으로 대단한 피해를 안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그라프 슈피로 인해 많은 선박들이 발이 묶이는 등 심리적인 영향이 더 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작전은 당연히 독일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영국도 독일 봉쇄령을 내려 독일의 해상 교역을 방해했습니다. 독일 봉쇄령이 내려졌을 때, 이미 많은 수의 독일 상선들이 바다에 나와있었습니다. 그중 30%는 중립국 항구로 대피했습니다. 독일 선박들은 중립국 항구에서 고립되거나 억류되었고 화물은 썩거나 못쓰게 되었습니다.
1939년 크리스마스까지 - 그러니까 그라프 슈피가 영국 상선 9척을 침몰시키는 동안 - 최소한 19척의 독일 상선들이 나포되거나 자침되었습니다. 비록 그라프 슈피의 활약이 인상적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영국이 독일보다 큰 성과를 거두고 있었습니다.
1940년 6월에 이탈리아가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였고 일본은 1941년 12월까지 영국과 충돌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동안 영국은 오로지 독일만을 상대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기간 독일의 해상작전은 영국에게 큰 스트레스를 주지 못했습니다. 유보트가 창궐하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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