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루달 Jan 22. 2024

<고도를 기다리며> 연극을 보고

고도는 무엇인가

<고도를 기다리며> 연극을 대학생 때 보았다. 제목도 <고도를 기다리며>이고 등장인물 고고와 디디가 나무 아래에서 고도를 기다린다고 말했기 때문에 나는 고도는 언제 나오며 그는 누구인가 궁금해하며 연극을 보았다. 반전... 고도는 결국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수많은 문학작품 중 나의 기억에 이리 오래 남는 문학적 흔적은 많지 않다. 그동안 시간도 많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나눈 대화는 어렴풋이 기억나며 그들은 낯설지 않았기에 다시 또 보고 싶었다. 이번에는 고도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보는 연극인데 나는 무엇을 확인하고 싶은 것일까.


반전의 효과는 크다. 당연히 죽을 거라 생각했는데 살아난다거나, 악인은 당연히 누구라고 생각했는데 착한 사람이 범인일 경우 우리는 오래오래 기억에 담아둔다. 넘쳐나는 기억 속에 사라지는 이야기는 많지만 반전 이야기는 참 생명이 길다. 왜일까. 그만큼 우리는 당연히 여기며 사는 똑같은 패턴에 너무나 익숙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해가 뜨고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자는 일상이 무너지면 우리는 불안하다. 처음에는 낯선 느낌에 들뜰 수도 있지만 머지않아 나의 일상을 돌려달라고 애원한다. 당연히 여기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문구, 얼마나 불안감을 조장하는가. 그런 문구는 현실의 만족은커녕 철저한 대비를 하느라 바쁘게 만든다. 안정에 대한 인류의 욕구는 그만큼 크다. 생명과 연결이 되니 당연하다. 그러니 나의 사고는 안전하기 위해서 정형화되었고 남들처럼 똑같이 예측한다. 그러다 나를 흔드는 반전이기에 이렇게 오래 기억에 남았나 보다.  그래도 왜 나는 의심하지 않았나 우둔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더 이상 반전의 효과는 없다. 이제 고고와 디디의 대화를 이해할 수 있는 나인지 확인하고 싶었고, 또 고도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싶었다. 문학적 해석이 깊지 않았던 20대와 지금의 나는 차이가 있을까. 이런저런 이유를 붙이며 보는 연극이다. 게다가 처음으로 예술인패스 카드를 사용하였다. 20대에 내가 예술인 등록이 될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다. 세상에나. 나는 거의 평론가처럼 연극을 보았다. 등장인물의 대사가 귀에 들어오고 의미도 알겠고 고도를 여러 방면으로 해석하며 보았다. 최초의 부조리극으로 많은 혹평과 관심을 받고 노벨 문학상까지 받은 작품이다. 그러나 어린 나는 과장된 평가이며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될 듯 되지 않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나는 좀 이해가 되었다. 나는 지금 문학적 이해가 깊어져서 연극을 이해한 것인가. 아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여러 경험을 하였고 특히 부조리한 세상을 알게 되었고 나도 부조리한 인간이었다. 그러니 고고와 디디는 이상한 사람이 아닌 나의 모습이다. 낯설지 않다. 남자 여자 부부의 전형을 깨는 두 인물은 부부와 같은 사이이다. 있으면 싸우고 서로의 생각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없으면 외로움을 느끼고 안아달라고 하는 사랑하는 사이이다. "안아줘"라는 대사도 기억에 남는다. 남자 친구끼리는 안아달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성별을 떠나 사랑하는 사람은 만져야 한다. 세월호 유가족이 남긴 말, "만지고 싶어." 이 말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공감의 눈물을 흘리는가.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사진으로, 그림으로, 목소리로 들어도 결국 만질 수 없음에 우리의 그리움은 사무치는 것이다. 고고와 디디는 다시 만나면 꼭 안는다. 서로 사랑하는, 없어서는 안 되는 관계이다. 그들은 고도가 누구인지 아는지 모르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래도 같이 기다린다. 신구 선생님과 박근형 선생님의 궁합은 찰떡이었다.


고도는 무엇인가. 나는 <모모> 책 속의 호라박사가 떠올랐다. 늙은 고고와 디디는 시간 개념이 다르다. 어제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어제 그 일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인가. 누구의 기억을 답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인가. 누구는 이 순간을 영원으로 받아들이고 누구는 찰나로 느낀다.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다. 동물과 사람이 사는 시간도 다르다. 공간 속에서도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누구와 함께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에 따라서도 시간은 달리 흐를 수 있다. 그럼 시간을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이 만든 제도인가. 아니면 신의 시계로 세상은 흐르는 것일까. 시간이 있기는 한 것인가. 기억을 못 하면 시간은 없는 것인가.


결국 시간이 흐르면 우리는 모두 죽는다. 고도는 죽음이다.  늙은 고고와 디디는 마치 죽음의 시간을 기다리는 것 같다. 기다림의 시간은 불안하고 느리다. 고고와 디디에게 온 포조와 럭키를 기꺼이 반갑게 맞이하는 것은 시간이 잘 흐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참견을 하느라 하루가 지났다. 그리고 양치기 소년이 와서 오늘은 고도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소년에게 고도는 친절하다. 시간은 생명의 시작점에게는 친절할 수밖에 없다. 젊음은 죽음과 거리가 멀뿐 죽음을 포함한다.


고도는 삶의 목표이기도 하다. 기다림은 대상이 있다. 목적어, 목표, 대상, 삶의 이유, 희망이다. 죽음이 목표일 수도 있다. 고고가 말한다. 우리는 묶인 것이 아닐까. 답답하다고 느낀다. 둘의 몸에 묶인 밧줄은 없다. 그러다 줄에 묶인 럭키를 본다. 누구의 노예는 행운인가. 노예 럭키는 묶인 채 가야 할 길이 있어 자유는 없지만 안정은 있다. 할 일이 있어 지루하지 않다. 럭키는 순종적이지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생각은 생각에 멈춰있다. 생각조차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목표이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보조는 눈을 잃었다. 그래도 럭키는 밧줄을 벗어나지 않는다. 끝까지 주인을 따른다. 럭키 역을 맡은 박정자 선생님의 긴 대사는 소름이 돋는다. 남성인지 여성인지 알 수 없는 럭키는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모습으로, 학자의 모습으로, 친구의 모습으로 그에게 복종한다. 고고와 디디는 기다림 그 자체가 목표이다. 기다림은 희망을 준다. 그러다 둘은 지쳐서 목을 맬 밧줄을 찾기도 한다. 이런 모습이 부조리함이다. 조리, 정확함, 한결같음이 어긋나면 낯설다. 그러나 나도 부조리하다. 같은 대상을 바라볼 때 나의 이익에 따라, 나의 사소한 감정에 따라 변하기 일쑤이고 남의 말을 똑바로 완전히 경청할 수 없다. 나는 그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껄인다"라는 단어가 참 많이 등장했다. 고고와 디디는 자신들의 대화를 지껄인다고 표현한다. 이 단어도 나의 귀에 들어왔다. 우리는 거창한 대화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사소하고 무의미한 대화를 많이 한다. "사람 살려"라는 보조의 말을 듣지 않은 채 둘은 지껄이는 대화에 집중한다. 말이 개별적이고 상대적이라 시간을 담을 수 없음을 그리고 진실을 놓침을 보여준다. 나는 작품 밖으로 나와 노년 배우들의 삶으로 들어갔다. 그들에게는 문학이 있고 연기자라는 도구가 있고 자기표현을 하는 목표가 있다. 그저 도도와 디디처럼 시간을 때우며 죽음만을 기다리지 않는다. 목표, 나에게는 부정적인 감정의 단어였다. 자유롭게 살기 위해 목표는 틀 같았다. 또 나를 노예처럼 부자연스럽게 만들고 시간을 빠르게 가게 만드는 요망한 것이라 느꼈다. 나는 또 고정된 목표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뉴스에 나오는 경제적 목표, 숫자들, 영업 실적의 막대 그래프, 경쟁 서바이벌이 연상되었다. 그러나 나는 <고도를 기다리며> 연극에서 목표의 다른 면을 보았다. 내가 연극을 본 이유와는 완전 다른 결과이다. 처음에는 고도가 무엇인지 알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목표가 있었기에 여기에 있게 되었고 나는 나만의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목표는 가는 방향이고 나를 찾는 길이지 목적이 아니다. 무언가를 꼭 얻어야만 하는 이유가 없는 삶이다. 고도를 기다리는 시간은 소중하며 슬프지 않았다. 노인에게 일자리를 주는 정책이 필요한 이유이다. 노년의 배우가 아닌 노년의 주름을 분장한 배우가 연기를 했으면 나는 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하루의 목표든 한 달의 목표든 우리에게는 기다리고 완성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미완성으로 보여주는 고고와 디디를 바라보며 나는 한참이나 기립박수를 쳤다.  

작가의 이전글 태국은 처음이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