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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완성 자서전 Aug 25. 2023

엄마의 시간

28개월 동안 가정보육을 했던 둘째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한 지 벌써 3주가 되었다. 아직도 낮잠 시간이면 엄마를 찾으며 선생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린다는 우리 아가. 어떤 날은 한 시간 가까이 울기도 한다니 이게 맞나 싶은 생각도 들지만, 난 안다. 우린 지금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필요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걸.


미국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동안 참 많이 힘들었다. 재밌는 건 둘째여서 그랬을까? 팬데믹이 한창인 시기에, 산후조리도 제대로 할 수 없는 미국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출산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육아는 매일매일 나의 한계와 바닥을 시험하는 것만 같이 힘이 들었다.


둘째 출산 후 병원에서 먹은 첫끼, 얼음물은 차마 마실 수 없어 거절했다


한국에서 첫째를 낳아 기를 땐 직장생활을 했었고, 입주 이모님과 시어머님의 도움까지 받았기 때문에 육아를 했다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였다. 물론 그땐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죄인으로 살아야 했던 워킹맘의 애환이 있긴 했지만 말이다. 이젠 가족도, 가족 같은 친구도 없는 미국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려니 모든 순간이 도전이다. 가장 어려웠던 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난 아이와 함께여야 했다는 것이다. 엄마의 시간은 있었지만 나의 시간은 없었다. 친구를 만나는 일도, 집 앞 산책을 하는 일도, 심지어 화장실을 가는 순간까지도 온전히 혼자일 수 없는, 그래서 그 어느 것도 나의 속도에 맞춰 할 수 없는 답답한 날들이 이어졌었다.


못 하게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인지라 그렇게 아이와 한 몸처럼 지내던 때에는 왜 그리 하고 싶은 것들이 많던지. 배우고 싶은 것도, 만나고 싶은 사람도, 가고 싶은 곳도 너무너무 많았었다. 그런데 참 희한하게도 아이가 없는 나만의 시간이 생기니 그저 조용히 혼자 있고 싶다. 뭔가를 해내야 한다는 부담 없이 그냥 나를 돌보는 시간을 갖고 싶다.


그래서 오늘 드디어 미루고 미뤘던 정기 건강검진을 다녀왔다. 미국에선 annual check-up 혹은 annual physical (exam)이라고 부른다. 둘째가 태어나고선 처음이니 매년 해야 할 검진을 두 번은 건너뛰었던 것이다. 나이 때문인지, 육아 때문인지 여기저기 안 좋은 곳이 많아서 어딘가 크게 아픈 건 아닐지 매일 걱정이 들었지만, 굳이 바쁜 남편에게 아이를 부탁하고 병원을 갈 필요가 있을까 싶어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닐 때까지 기다렸었다.

 

주치의 선생님을 만나 그동안 아팠던 곳들을 말씀드리고 나니 왠지 엄마에게 투정을 부리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나 많이 힘들었다고. 그렇게 선생님과 마주 앉아 시간 걱정 없이, 아이의 방해 없이 나의 건강에 대해 말하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시간이었다.


오랜만에 나를 위해 찾은 병원

엄마의 시간은 아이를 중심으로 흐른다. 그래서 그 시간의 진짜 주인인 엄마 자신은 정작 그 시간 속에서 뒷전인 경우가 많다. 내 시간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것도, 느리게 흐르는 아이의 시간에 맞추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엄마들은 늘 혼자만의 시간을 꿈꾼다. 그런데 아이와 떨어져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서야 알았다. 엄마가 아이와 떨어져 갖는 혼자만의 시간도 결국엔 아이를 위한 엄마의 시간이라는 것을.


아이에게 한 번 더 웃어주는 마음 건강한 엄마가 되기 위해, 아이가 엄마처럼 되고 싶다는 꿈을 품을 수 있게 하는 무언가에 열정을 가진 엄마가 되기 위해, 아이 곁에 오래오래 있어주는 건강한 엄마가 되기 위해 엄마의 몸과 마음을 돌보는 시간을 보내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난 오늘, 곧 어린이집에서 돌아와 다시 내 품에 안길 둘째를 더 힘껏 안아주기 위해 엄마인 나의 건강을 돌보고, 나의 마음에 힘을 주는 글쓰기를 하며 이전과는 다른 엄마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런 엄마의 시간이 나에게도 아이에게도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길 소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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