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도 안 보고 사세요?"
대학생 때였다. 기침이 오래가서 내과를 찾았는데 문제는 감기가 아니라며 의사가 건넨 말이다. 목에 큰 혹이 있다고 당장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병원을 나와 소견서를 들고 무작정 근처 대학병원으로 가던 그 길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초음파 검사를 받고 갑상선에 큰 혹이 있다는 걸 확인했고 다행히 양성 물혹이라 미용상의 문제가 아니면 그냥 두어도 된다는 진단을 받았었다. 하지만 그 후 15년도 넘는 시간이 흐른 지금, 처음 대학병원으로 가던 그날, 그 길 위에서 느꼈던 불안함을 다시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미국에서 둘째 아이를 출산하고 아이가 28개월이 되어 얼마 전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한 후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건강검진이었다. 아이와 함께 병원에 가는 것도, 바쁜 남편에게 아이를 부탁하고 병원에 가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아서 검진을 미루어 왔었다. 오랜만에 만난 주치의에게 늘 피곤하고 자주 어지럽다고 하니 운동은 하냐고 물었다.
또 다 아는 운동 이야기네…몰라서 안 하는 건 아닌데…하는 사춘기 아이 같은 생각을 하며 앉아 있는데, 차트에서 내 갑상선 혹 관련 기록을 보곤 초음파 검사를 해보자고 하셨다. 처음 혹을 발견하고 15년 동안 수차례 초음파 검사를 받았지만 별 문제가 없었기에 이번에도 가벼운 마음으로 검사를 받았다.
검사 후 4일이 지난 날 선생님께 전화가 왔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본론을 꺼내신다.
“암일 가능성이 있어 보이니 조직검사를 해봅시다.”
많지는 않지만 내 주변 사람들 중 암투병을 한 분들은 그들 인생의 가장 힘든 순간들을 버텨내고 난 후 암을 마주하게 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내 몸속에 암일 수도 있는 존재가 있다는 걸 알고 나니, 미국에서 이민생활을 하며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힘든 시간을 버텨내고 있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주치의는 갑상선 결절 조직검사를 하는 전문의에게 추천서를 써주었고 검사를 받기까지 두세 달을 기다려야 할 거라고 했다. 가까운 친구들에게 사정을 이야기하니 미국에서 기다리고 있지 말고 한국으로 가서 빨리 검사를 받으라고들 했다. 하지만 엄마인 내가 자리를 비우면 아이들과 남편의 일상이 모두 흔들릴 것이다. 한국이 그 어느 때보다 그립지만,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 나의 집이고, 이곳에서 살아갈 방법을 찾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음파 검사 결과지에 쓰인 ‘비정상적’, ‘악화’와 같은 단어들을 보면서 마음이 약해지기도 했지만,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인데 방법이 있을 거라 믿고 검사를 더 빨리 받을 수 있는 병원을 찾아 여기저기 연락을 해보기 시작했다. 주치의가 해야 할 일 같지만 미국에선 그렇지 않다. 환자인 나에게 직접 찾아보라고 했다.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주치의가 말한 것과 상황이 크게 다르진 않았다. 하지만 포기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한 곳만 더 전화를 해보자 하고 전화를 건 곳에서 한 달 후로 검사 일정을 잡아주었다. 먼저 전화를 걸었던 병원들보다 덜 바쁜 곳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잊을 수 없는 건 바로 예약 전화를 받은 분이 나를 대하던 태도였다. 환자인 내가 느끼는 불안을 공감해 주고 어떻게든 더 빠른 날짜로 검사를 예약해 주려고 애쓰던 그분의 노력이 전화기 너머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예약이 가능한 날짜를 찾고는 내 일처럼 기뻐해주던 그분 덕분에 난 쉽지 않은 타향살이를 다시 이어갈 힘을 얻었다.
타향살이를 하다 보면 종종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지는 위기의 순간들이 찾아오곤 한다. 그런 순간들 중 최고가 아마도 몸이 아플 때일 것이다. 자신의 일에 대한 사명감, 혹은 연민...한마디로 정의하긴 힘들지만, 얼굴도 모르는 전화기 너머 그녀의 작은 친절 덕분에 난 때때로 끝없이 고독해지는 타향살이 속에서 난 혼자가 아니라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작은 친절은 한동안 나에게 잔잔하고도 큰 감동으로 내가 타향살이를 이어갈 수 있도록 힘을 줄 것이다. 검사결과가 좋든 나쁘든 이미 난 고향에서 이역만리 떨어진 이곳 미국에서 내 생명의 은인을 만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