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영 <어떤 양형 이유>, 리처드 이어 <칠드런 액트>
"법정은 도덕이 아니라 법을 다루는 곳이다."라고 선언하는 「칠드런 액트」의 호기로운 대사와 함께, "불법과 적법의 영역에는 선악이 개입될 수 없다. (중략) 법정은 선악의 공론장이 아니다."라고 써 내려간 「어떤 양형 이유」를 보고, 읽고서 정의란 것에 대해 다시금 면밀히 숙고해 보게 되었다.
우리는 언제나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 외치고, 사회는 늘 정의를 향해 진일보하고 있다 말하지만, 우리 주위의 무수한 장발장들 앞에서 그런 선언은 속수무책일 뿐이다. 살기 위해 법을 어기고 죄를 저질러야만 하는 삶들 앞에서, 안온한 마음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 정의를 논할 순 없는 일이다. 사회에서 쫓겨나고 내몰린 이들은 그저 살고자 하는 마음에, 악인이 될 각오로 죄인이 되고야 만다. 그래야만 사회가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주니까. 갈라지고 피폐해져 버린 목소리를 그때서야 들어주니까.
법이라는 울타리 바깥에 존재했던,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은 그제야 죄인이란 명찰을 부여받은 채 울타리 안으로 들어선다.
유죄 혹은 무죄만이 존재하는 울타리에선, 무죄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정의롭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처음부터 울타리 바깥에 존재해 왔던 이들에겐 그렇게 살아갈 기회조차 없었다. 죄인의 신분으로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거나, 아니면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를 울타리 밖 무법지대에서 그 연약한 삶을 이어나가거나.
그들이 무죄로 살아갈 기회를 얻지 못했던 것만큼이나, 어쩌면 우리 역시 죄를 지을 만한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안온히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감히 그 울타리를 부술 순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넓힐 순 있을 것이다. 지금보다 더 넓게. 더 엄밀하고 정교하게. 그 누구도 법에게서 소외되지 않게. 그렇게 넓혀가다 보면 언젠가 그 어떤 사각지대도, 어떤 자그마한 빈틈도 남기지 않게 될 날이 오게 될까. 우주의 크기만큼이나 넓어진 울타리와 정의 안에서, 모두가 행복하진 않더라도 모두가 불행하진 않으며 살아가게 될 날이 오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