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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환일 Nov 01. 2020

또렷한 꿈은 아득한 기억보다도 선명해서

우리 모두의 구운몽

 장률 감독을 좋아한다. 정확히는, 장률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 더 정확히는, 장률 감독의 영화 「경주」와 「춘몽」, 「군산」, 그리고 「후쿠오카」를 좋아한다. 이 네 편의 영화들에서 일관되게 풍겨져 오는 꿈과 현실의 그 흐릿한 경계를 좋아한다. 선명한 꿈, 모호한 현실 앞에 선 인물들의 모습을 보며 그의 영화를 좋아하게 됐다. 하지만 정확히는, 내가 본 장률 감독의 영화들이 고작 저 네 편이 다이기도 하다.

 우리는 꿈이 아닌 현실과 닿아 있다. 어슴푸레한 잔상으로 남는 꿈과는 달리 현실은 지극히 선명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현실을 기억하고, 꿈을 망각한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지난 꿈은  희미해지지만 지난 기억은  견고해져만 간다. 하지만 정확히는, 그리움이란 향수 앞에서 꿈과 현실은 전복된다. 그리움을 머금은 꿈은 지독히도 또렷하다. 돌아가신 부모님, 헤어진 연인, 잃어버린 감정, 잊어버린  향기와  음성. 또렷한 꿈은 아득한 기억보다도 선명해서, 그리움은  서슬이 되어 폐부를 찌른다. 해상도가 높아버린 탓에  잔상이 현실에까지 미친다. 장률 감독의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힘겹게 붙들어가며 기억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니라   환상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운 현실을 꿈으로 기억하는 것만큼이나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있을까. 그래 이따금씩, 휘청이긴 해도 떨어지지만 않으면 된다. 그만큼만 그리워하고, 그렇게만 버텨내면 된다.

 그리움은, 낡아버린 기억이 아닌 생생한 꿈을 자양분 삼아 자란다. 그러니까 정확히는, 꿈을 꾸며 그리움을 연장해나가는 것이다.

영화 「경주」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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