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랑 영화를 맹목적으로 소비하던 때가 있었다. 물론 지금도 종종, 독서와 영화 감상을 의식적으로, 습관적으로 소비하곤 한다. 자격증이나 영어 공부 같은 자기계발은 더럽게 안 하면서도, 책 한 권, 영화 한 편 안 보는 날엔 내 삶이 아무런 발전도 없이 정체되어있는 것만 같은 불안감을 느끼곤 했다.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지만, 사실 누군가에겐 그저 휴식이고 유희거리일 뿐일 독서와 영화 감상을 통해 인생을 배우고, 삶이 좀 더 풍요로워졌다고 자위하며 졸렬한 자기만족을 하는 내 모습이 우스꽝스러울 때가 많다. 나를 찾아 나서겠다는 미명 아래 행해졌던 독서와 영화 감상은, 내 안 깊은 곳에 잠복해있던 지적 허영심과 스노비즘의 발현에 열려라 참깨를 외친 격이었다. 넓고 깊은 사람이 되고자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봐왔던 것들은 되려 나를 편협한 인간으로 구축해 놓았다. 새로운 콘텐츠를 섭취하면 섭취할수록 내 생각과 취향은 점점 확고해져만 가서 되려 좁고 깊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스스로 파내려간 그 고약한 구덩이는 심지어 꽤 깊어져 버린 탓에, 빠져나오긴 글러 먹었고 나조차도 그곳에 매몰돼버린 듯하다. 지식과 지혜의 포만감은커녕 허영과 자만의 팽만감이 나를 가득 채웠다. 순진무구한 아이가 찰흙놀이를 할 때처럼, 지저분한 찰흙들을 이리 붙이고 저리 붙여가며 만들어낸 거대한 갈색 덩어리가 마치 내 모습과 같다. 남들 눈엔 진짜 똥처럼 보이겠지. 책과 영화라는 찰흙들을 애써 붙여가며 그 크기를 키워 왔지만, 그것은 아직 작품이라던가 어떤 뚜렷한 형체에 다가가진 못 했다. 거대하기만 하고 모양은 엉성한 그 똥덩어리를 예리하게 깎아내고 덜어낼 조각칼이 필요했다. 더 명확하게, 더 또렷하고 선명하게. 크기는 줄어들지언정 더 단정하고 아름답게. 내가 브런치를 시작하게 된 이유가 실은 여기에 있다. 과연 글을 쓰는 행위가 조각칼이 될 수 있을까. 글을 써내리면 써내릴수록 내 사고와 인생은 더 정연해질까. 내 생각과 행동이 스스로 적어내린 문장과 단어에 가닿을 수 있을까. 아직도 글을 쓸 적마다 내가 나를 속이는 순간이 많은 걸 보면, 연장을 흉기처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조각칼을 반대로 쥐어 잡고 스스로 자기 몸에 상처를 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채 소화도 못한 글을 배설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