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률 감독을 좋아한다. 정확히는, 장률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 더 정확히는, 장률 감독의 영화 「경주」와 「춘몽」, 「군산」, 그리고 「후쿠오카」를 좋아한다. 이 네 편의 영화들에서 일관되게 풍겨져 오는 꿈과 현실의 그 흐릿한 경계를 좋아한다. 선명한 꿈, 모호한 현실 앞에 선 인물들의 모습을 보며 그의 영화를 좋아하게 됐다. 하지만 정확히는, 내가 본 장률 감독의 영화들이 고작 저 네 편이 다이기도 하다.
우리는 꿈이 아닌 현실과 닿아 있다. 어슴푸레한 잔상으로 남는 꿈과는 달리 현실은 지극히 선명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현실을 기억하고, 꿈을 망각한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지난 꿈은 더 희미해지지만 지난 기억은 더 견고해져만 간다. 하지만 정확히는, 그리움이란 향수 앞에서 꿈과 현실은 전복된다. 그리움을 머금은 꿈은 지독히도 또렷하다. 돌아가신 부모님, 헤어진 연인, 잃어버린 감정, 잊어버린 그 향기와 그 음성. 또렷한 꿈은 아득한 기억보다도 선명해서, 그리움은 곧 서슬이 되어 폐부를 찌른다. 해상도가 높아버린 탓에 그 잔상이 현실에까지 미친다. 장률 감독의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힘겹게 붙들어가며 기억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니라 꿈 속 환상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운 현실을 꿈으로 기억하는 것만큼이나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또 있을까. 그래 이따금씩, 휘청이긴 해도 떨어지지만 않으면 된다. 그만큼만 그리워하고, 그렇게만 버텨내면 된다.
그리움은, 낡아버린 기억이 아닌 생생한 꿈을 자양분 삼아 자란다. 그러니까 정확히는, 꿈을 꾸며 그리움을 연장해나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