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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Aug 28. 2017

이태원에서 노는 사람 말고 사는 사람은 처음 만났어

드로잉 모임에 가다.

나는 ‘로토스코핑(Rotoscoping) 드로잉 파티’에 가는 중이었다. 페이스북 페이지에 ‘가고 싶음’ 의사를 표시한 덕분에 친구 몇이 아는 척 말을 걸었다. 한 명은 맨 끝 단어인 ‘파티’만 읽었는지 ‘어디 재미있는 파티에 가나 봐?’라고 했고 한 명은 그나마 중간에 ‘드로잉’을 읽어서 ‘거기서도 그림 그리는’ 내가 부럽다는 말을 남겼다.


로토스코핑은 간단한 애니메이션 기법인데 요즘엔 손으로 작업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특별히 손으로, 그것도 아주 많은 사람의 손을 빌려야 완성된다. 100년 전인 1917년 12월 할리팩스 폭발사건으로 2천 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다. 도시가 폐허로 변하면서 다들 비참하고 우울한 일상을 보냈는데 그 풍경이 고스란히 필름에 남아 있다. 그 흐릿한 필름을 컷 별로 잘라서 인쇄한 후 참여자들이 그 위에 종이를 대고 따라 그린다. 새롭게 그려진 펜 드로잉을 모아 다시 영화로 만든다. 이게 내가 참여할 프로젝트의 최종 목표다.


(아래 왼쪽: 허물어진 집 옆에 서 있는 사람이 찍힌 컷을 골랐다. 오른쪽: 종이를 대고 선을 따라 그렸다.)



지금까지 이 프로젝트에는 40명 정도 참여했고 나도 이름을 적었다. 12월이 되면 방송에서 이 필름을 상영할 예정이라는데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내 손길이 닿은 그림이 들어간다. 집중력을 발휘해 5장 정도 그리자 슬슬 주변 풍경이 시끄럽게 느껴졌고 팔이 아파왔다. 집에 갈 시간이라는 걸 느꼈다. 재잘대는 어린아이 사이에서 혼자 벌떡 일어나 그림을 제출하고 주최자인 Becka에게 불쑥 말을 걸었다. 


몇 마디 이야기를 시작하자 놀라웠던 것은 머리가 군데군데 하얗게 변한 Becka가 최근 한국에 몇 년 살았다는 사실이다. ‘아산’이라는 발음이 명확하게 들렸다. ‘천안에 살았구나.(KTX 정차역 중 천안아산역이 있다는 걸 기억한 덕분이다.)’라고 하얗게 웃자 그녀도 반가워했다. 


‘너도 천안에 살았니?’ 

‘아니, 난 이태원에 살았어.’

‘어, 나 이태원에서 노는 사람 말고 사는 사람은 처음 만났어.’

‘하하. 다들 그래.’ 


그녀는 원래 내가 가려고 했던 학교의 애니메이션 과목 교사였고 우린 꽤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공통점이 몇 가지 있었다. 우리는 첫 대학시절 공부했던 과목과 전혀 다른 길을 선택했고, 개인 작업이 커뮤니티에 도움이 되길 바라고, 결혼을 했고 치즈 떡볶이를 좋아했다. 서로 나이를 묻지 않았기에 그녀의 눈을 바라볼 때마다 ‘우리 엄마 또래일까.’ 궁금했지만 덕분에 빠르게 친구가 되었다. 


토요일 오후 거리는 조용했다. 아무도 없는 도로에 마른 나뭇잎이 또르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날씨는 맑았지만 바람에 슬몃 찬 기운이 느껴졌다. 가을이 신호를 깜빡이고 있었다. 애써 오겠다는 가을바람을 말리고 싶은 욕심을 중얼대며 씩씩하게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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