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관리를 다시 고민하다.
손꼽아 기다렸던 대학생활은 어떨까. 풀밭에 누워서 캠퍼스의 낭만을 즐기는 건 잠시 접어두더라도 같은 코스를 듣는 학생들과 말 한번 섞기 어려웠다. 처음 며칠간은 내게 무슨 문제가 있는 줄 알았다. 한국에서도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 가면 불순물처럼 둥둥 떠다녔던 성격이라 딱히 영어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만 내가 어려워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그들이 날 어려워했다. 수다라는 게 대부분 농담이 섞인 일상 대화라 정의한다면 그들과 공통점이 거의 없는 동양인인 나에게 그들이 친근하게 다가올 리 만무했다. 내가 몇 번 말을 걸고 조금 더 대화를 길게 이끌어가고 싶다는 의사표현을 해도 다음 날이 되면 되돌이표로 돌아가 서먹서먹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하나뿐인 국제학생 신분에서 날 구해줄 다른 동양인이 꽤 늦게 코스에 들어오면서 그나마 말을 붙일 상대가 생겼다는 점이랄까. 그 친구는 아예 처음부터 나를 콕 집어 말을 걸고 옆에 앉고 밥을 같이 먹자고 했다. 뒷말을 흐리는 특유의 영어 악센트를 가진 그녀의 말을 60% 정도밖에 알아들을 수 없지만 우리는 그럭저럭 좋은 클래스메이트로 지내고 있다.
한국에서는 나의 인간관계를 독립적으로 보기보다는 주변의 분위기에 내가 얼마나 못 맞추고 있는지를 확인하며 우울해질 때가 있었다. 다들 단짝 친구가 있고 같이 밥을 먹는 무리가 있는데 나 혼자 외톨이임을 알게 되면 스스로 왕따라는 자각을 했고 더 괴로웠다. 하지만 이 곳에서는 모두가 스스로 왕따를 자처했다. 밥은 대부분 집에서 싸와서 혼자 먹고 숙제할 때는 어딘가 나만의 구석진 곳을 찾아가고 집에 갈 땐 인사도 없이 휙 사라진다. 짬이 나면 농담을 주고받으며 수다를 떨지만 단지 그때뿐.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처럼 짝을 이루어 열심히 붙어 다니지 않는다. 그들 사이에서 나는 간간히 외롭지만 아직 괜찮다.
무뚝뚝한 캐나다 친구들이 나를 향해 반짝이며 관심을 보일 때가 있다. 바로 서로의 과제를 확인하는 시간이다. 이 학교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내가 느끼기에 수업 진행 방식이 참 독특하다. 수업의 한 텀이 3시간이라면 그중 30분 정도를 교수가 일반적인 강의를 한다. 그리고 1시간에서 2시간 정도 과제를 꺼내놓고 토론을 한다. 시간이 남으면 다음 과제를 바로 시작한다. 첫날과 둘째 날에는 과제가 없었기 때문에 수업이 굉장히 빨리 끝났다. 생각보다 수업이 여유롭네?라고 오해한 것도 잠시, 곧 모든 강의가 과제와 실습 위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숙제의 덩어리가 크면 2주 치로 나누어 중간검사를 했다. 하지만 토론이 과제의 결과를 두고 비판할 내용을 찾는 방식이 아니라 프로세스에 교수와 학생이 모두 참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학생의 출발선이 다르기 때문에 결과물은 모두 달랐지만 개인이 어느 정도 발전을 이루었는지가 더 중요했다. 토론을 시작하면 교수는 한 명씩 지목하며 묻는다.
'너는 이 과제를 통해 뭘 배웠니?'
로봇을 그려오는 숙제가 있었다. 기본적인 상상력과 드로잉, 일러스트레이터 툴을 연습하는 기회였다. 문제는 로봇 1개가 아니라 9개를 그려오는 게 포인트였다. 모두의 숙제를 띄워놓고 하나씩 보기 시작했다. 누군가에는 탄성이, 누군가에게는 침묵이 흘렀다. 교수는 결과물이 당연하다는 듯 한 명씩 지목해서 묻기 시작했다. 대부분 학생들은 '시간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힘들었다.'라는 답을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로봇을 그리는 데에 투입해야 하는 시간이 꽤 많았다. 그래서 90% 이상의 시간을 로봇 하나에만 쏟고 나머지 10%를 8개에 나눠서 쓰다 보니 로봇의 질에 차이가 났다.
나는 밤을 새웠다. 반칙한 기분이 들어 얼굴이 뜨거웠다. 다른 학생들처럼 나도 3,4시간이면 끝날 줄 알고 덤볐다가 생각보다 오래 걸리자 고민하지 않고 잠을 포기했다. 그리고 배우지 않은 기능과 개념을 활용해서 공들여 해가 뜰 때쯤 과제를 끝냈다. 내 과제를 다들 최고로 뽑았지만 다른 학생들은 '다음번에는 잘할 거 같아요.'라고 대답할 때, 나는 '또 하라면 못할 것 같아요.'라고 대답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교수는 그 수업을 끝내며 디자이너로서 시간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해서 설명했다. 너무 무리하는 것도, 만족할만한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한 것도 모두 시간관리에 실패한 거라 했다. 장기적으로 일을 즐기면서 하려면 그만큼 철저하게 시간을 분배하고 칼같이 지켜야 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고 했다.
나는 아직 내가 한국에서 배운 결과형 성취 모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내 건강을 해치면서라도, 어떻게든 누군가의 요구를 맞추기 위해 애를 써야만 하는 몇 년간의 경험을 익숙하게 반복하고 있었다. 한국 뉴스에서 자주 '야근하면 오히려 타박하는 회사', '야근은 무능의 다른 말'이라는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클릭하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말 뒤에 숨은 진짜 의미는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