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경민 Oct 04. 2023

로컬, 로컬. 로컬?


로컬이 휩쓰는 자리에 대한 감상문

지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 '로컬'이라는 키워드에 관심을 가지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에서 말하는 '로컬'의 정의는 꽤나 다양한데, 그중에서 큰 영역을 차지하는 것이 '건축(리모델링), 창업, 상권형성, 트렌드, 라이프스타일'로 이어지는 맥락이다. 그런데 이 맥락을 계속 지켜보고 있으면 로컬에 맞게 방향성을 이어나가는 사례도 있지만, 대부분 굳이 '로컬'이라는 단어를 붙어야 하는지 의문이 드는 사례들이 많다. 특히나 로컬 사업이라고 칭해지는 것들 말이다. 그냥 지역에서 창업했고, 상권이 형성되었고, 기존에 있던 건축물을 활용해서 리모델링하고(여기에 지역의 이야기가 빠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새로운 콘텐츠를 넣어서 사람들을 유입하게 한다. 이 중에서 로컬과 연관성 없이 경제적 자본만 들어오는 대부분인 상황인데, 왜 로컬이라고 하는지 의문이다. 겉에서 봤을 땐 굳이 로컬에 있지 않아도 될 만큼 로컬스럽지 않다. 또한 로컬기업이나 브랜드라고 하는 곳의 대부분이 식음료에 업종에 치중되어 있다.


지역의 문화나 커뮤니티를 형성할 수 있는 업종이 생겨나는 것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하물며 생긴다고 해도 지속가능하지 못하고 영업을 종료하는 것을 많이 봐 왔다. 임대료가 상승하면서 젠트리피케이션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진짜 '로컬'기업으로써 자리 잡고 오랫동안 영업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러지 못한다. '로컬'이 내포하는 범위가 넓고 확장될수록 '로컬'의 본질은 사라지고 '로컬'처럼 보이는 이미지만 남는다는 것이 가장 큰 허점이 아닐까 생각된다. 혹시, '로컬'이라고 칭해지는 것들이 휩쓸고 간 자리를 다시 찾아가 본 적이 있는가? 이전보다 나은 상황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 잠시 머물렀다가 갔고, 그 여파는 고스란히 지역에 남은 사람들이 상황과 분위기를 견뎌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잠시나마 소리 높이 '로컬'이라 목소리를 내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의문이 들뿐이다. 이러한 맥락을 로컬현상의 중심에서 현재를 가장 잘 보여주는 글을 찾았다.


물론 이 글이 전부를 말하는 건 아니지만, 로컬이라고 칭해지는 사업들이 안고 있거나 혹은 보이지 않는 지점들을 '콕'집어서 말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이 글에서 전하는 메시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필자가 솎아낸 말들이 대부분 개인적으로는 공감하는 내용들이라 공유해서 함께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아서 길어도 굳이 써 본다. 여러 번 곱씹으면서 현재 한국에서 언급되고 있는 '로컬'의 의미와 로컬사업의 진행과 흐름에 대해 짚어보면 좋을 것 같다.


나에게 로컬은 회사에서 끊임없이 사용하는 그저 업무 용어일 뿐이었고, 내 삶의 현장이 아닌 그냥 일터에 불과했다. 왜들 그리 로컬에 집착하는지, 그저 막연하게는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내기에 활용하기 쉬운 개념이라고도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아프리카 땅을 탐욕적으로 땅따먹기를 했던 지배국가들의 욕망이 지금의 국경과 문화를 만들어낸 것처럼, 그저 인간의 욕망이 뿌리내리기 참 적절한 물리적 토양의 모습이었다. 가령 내가 머물렀던 을지로의 모습이 딱 그러했다. p48


을지로에 살지 않는 임대인들이 을지로에 사는 임차인을 쫓아내는 신랄한 멘트들과 서울시 기금으로 을지로에서 활동하는 로컬회사들의 이해타산적인 모습들은 어찌 보면 상당히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였다. p49
로컬 사업의 기조는 지역의 고유한 특수성과 현재 놓인 문제점을 찾아 지역 의제를 발굴하고 현재보다 나은 방향의 개선점을 찾는 것이며, 지역민들에게는 문화 시민으로서의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형태의 주제를 담고 있는 경우를 많이 봐왔다. 주민 친화적이고 지역에 대한 환대를 내세우는 로컬 사업은 사실 그리 멀지 않은, 가까운 동네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가령 지명 이름을 따서 네이밍을 한 사업의 참여 대상이 지역 주민인 경우에는 거의 대부분 로컬 사업이라고 봐도 좋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말로 가득한 로컬 사랑 표어를 실천하는 관이 로컬을 대하는 태도는 사실 그리 친화적이지 않다. p49-p50
관이 로컬 사업을 설계 및 수행할 때, 그 모든 과정에서 행정절차라는 것을 밟는다. 내가 목격한 로컬 사업의 모순 중 하나는 이 행정이라는 것이다. 관이 설정한 행정 절차는 익숙해지면 상당히 편한 관리 시스템이다. 어떠한 일을 공동으로 수행함에 있어서는 합당하고 명확한 기준과 지표가 필요하다. 이를 근거로 목표 혹은 성과를 수치화할 수 있는 등의 정량적 분석과 연구적 접근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행정이기도 하다. 이 말은 즉, 모든 로컬을 모의고사 성적처럼 동일선상에 올려두고 평가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로컬 사업에 뛰어든 민간은 여기서 암묵적인 등급이 매겨진다. 어느 정도 관의 행정과 입맛을 알아듣는 민간은 로컬 사업 헌터로 불리며 지속적인 혜택과 지원을 누릴 수 있다. 이에 반해 행정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한 민간은 도태되는 형태가 되고 만다. 심지어 관 또한 본인들이 설정한 행정을 잘 수행할 줄 아는 민간 업체를 화이트리스트로 인지하고 그들에 대한 지원을 훨씬 수월하게 생각한다. 과연 이러한 행정 방식을 모든 로컬에 동일하게 적용하는 것이 적절한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자유로운 개인의 장소들로 뭉쳐진 원형 로컬 위에 관 행정의 로컬사업은 인위적인 포장지 같았다. p51
관 행정의 탑-다운 체계는 견고하다. 처음에는 로컬에 맞는 행정을 달리 적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로컬에 머무는 사람들은 사실 생각보다 로컬 사업을 모르거나 관심이 없는 경우도 상당하다. 관은 그들만의 리그 안에서 편리한 관리 시스템인 행정을 로컬마다 달리해야 할 필요성이 있을까? 행정은 개인의 공간, 아주 작은 단위 구성원의 집단이 머무는 로컬에 필수적이지 않지만, 로컬 사업을 설계한 이들에게는 수행과 평가의 측면에서 불가피한 모순을 일으킨다. 관은 그저 예쁜 포장지를 꺼내 로컬을 포장할 뿐이다. 진정성보다는 그저 관이라는 존재가 당연히 수행해야만 하는 역할이며, 하나의 과업에 불과해 보였다. 지역민들도 모르게, 지역이 어떤 형태로 평가되고 있는 로컬사업은 내 눈에 위선자들이 만든 무대 같아 보였다. p52
로컬사업의 모순은 행정적인 부분뿐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모순은 로컬 사업의 종료다. 사업의 종료된 그 이후 남겨진 로컬의 모습은 다소 외로웠다. 큰 자본으로 관이 로컬에게 씌워준 포장지는 유통기한이 짧다. 유지와 운영이 자생적, 지속적으로 이어지기 어렵다는 말이다. p52
앞서 말했지만 로컬 구성원들은 개인의 삶을 이어가기 위한 장소에 터를 잡은 것이지, 목표지향적인 로컬의 대의를 위해 그곳에 정착한 것이 아니다. 성공적으로 끝이 난 로컬사업의 결말이 더 잔인한 이유가 이것이다. 사업 종료 그 이후의 잔여물은 로컬 사업을 담당하는 주체가 아닌, 결국 그곳에 남아 자리한 로컬이 감당하게 된다. 그 로컬 사업이 젠트리피케이션을 야기하더라도 말이다. p53


을지로의 풍성한 자원으로 로컬 사업이 꽤나 흥행하던 중 재개발 시행에도 불이 붙었다. 박원순 시장의 자살과 오세훈 시장의 등장이 맞물리면서 을지로에는 더욱 아이러니하고, 괴상한 광경들이 보였다. 로컬 사업의 주체들은 사라지고 있는 을지로의 현재 모습을 중요하게 여기며 온 힘으로 할 수 있는 문화예술을 총동원해 사업을 화려하게 진행했다. 그 와중에 재개발 공사로 인한 크레인 소리는 로컬 사업의 배경음악이었다. 정부의 색깔이 바뀔 때마다 로컬 사업의 생명은 위태롭다. 정확히는 사업 자체 보다 관의 기금을 받아 로컬 사업을 수행하는 하위 단위 조직들이 위태롭다.

로컬 사업으로 자금을 마련하는 민간 조직은 정부의 입김으로 머물던 곳을 떠나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이 로컬을 떠나면 로컬에 쌓아 올린 결과물들이 한순간에 주인 잃은 유기물이 되고 만다. 로컬의 가치를 알리기 위해 만들어낸 모든 결과물은 사업 종료와 동시에 운영할 자본도, 유지할 주체도 없이 그냥 그 자리에 남아, 벽화가 낙서가 되는 광경을 나 또한 익숙하게 겪어봤다. 성과 좋은 성공적인 사업이라 할지라도 그 사업이 종료된 이후 지역 안에서 자생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 생겨나지 못한다면 과연 그것을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현재 놓인 로컬의 개선점을 찾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은 정말 관이 컨트롤 타워의 역할을 해주는 것뿐일까.

로컬 사업 주체들이 지역민들과 라포를 형성해 놓고 사업이 종료되면 매정히 떠나는 방식이 과연 로컬에 대한 진정성을 담아 계획한 사업이 맞을까. 나 또한 그 과업을 수행하는 한 사람으로서 누군가의 생의 현장에 MSG를 뿌리고 도망가는 모습이 참 스스로도 위선적이었다. p53-54

로컬사업을 한다고 해서 그 안에 속해 있는 사람 개개인이 전부다 '로컬'에 대한 개념, 현상, 의미를 알고자 하는 것은 아니며, 체계적으로 단계를 만들어 쌓아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비단 개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업을 이끌어가는 관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로컬을 대하는 태도와 로컬사업을 이끄는 주체에 행하는 태도를 수도 없이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로컬'이라는 개념과 전국에서 진행되는 '로컬사업'은 본질적으로 되짚어 봐야 하는 로컬 개념과 달리 환상과 이미지를 키워주고 있는 것에도 한몫을 하며, 이것마저도 하나의 현상으로 자리 잡는 것처럼 보인다.


*앞서 인용한 글의 내용은 [비평웹진 퐁]의 <퐁로컬리티 워크숍> 일환으로 제작된 도서 <이방인의 눈>에 실린 내용입니다. 글쓴이는 솔잎이며, 제목은 <로컬에서 살아남기>입니다. 글 내용의 일부는 해당 사이트에도 게재되어 있으며, 저자와 제작자의 허락을 구하고 공유합니다.

*

https://echo.pong.pub/11? fbclid=IwAR2 lcAU9 LNpyW5 HlTXpYI8 BOTiwCfX0 Ob_sC4 XQ38 jPQRpW-3 Wg1 yWv6 dEo


매거진의 이전글 [기고] 도시를 걷는다는 것의 의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