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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동, 세겹의 시간과 시선

메모리루트: 정릉읽기, 스페셜루트프로그램

by 이경민

길을 잃은 채 나아간 알 수 없는 여정 끝에, 북악스카이웨이 그리고 북악팔각정

몇 년 전 성북동으로 이사했다. 언젠가부터 이사한 동네를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낯선 동네에 익숙해지는 과정임과 동시에 동네가 있는 지역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어느 날은 지도를 살피던 중 ‘북악스카이웨이’가 눈에 띄었다. 명확한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 길을 걸어 북악팔각정까지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동네에서 북악스카이웨이까지 걸어서 가도 될 만큼 가까웠다. 북악스카이웨이가 시작되는 진입로만 잘 찾아서 앞으로 걷기만 하면 되었다. 지도를 살피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던 중 초반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첫 번째 갈림길이 나왔고, 길이 애매하게 이어졌다. 게다가 군사시설 보호구역이라는 경고문이 쓰인 입간판이 있어서 가도 되는 건지 아닌 건지 헷갈렸다. 고민하며 서성이고 있는데 마침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사람들이 이렇게 오는 데 가다 보면 북악스카이웨이길이 나오겠지.’라고 가볍게 넘기고 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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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애석하게도 앞으로 나아갈수록 또렷하게 그어져 있던 길은 점점 옅어지고 이 길이 맞나? 아닌가? 헷갈려 뒤를 돌아보는 일이 잦아졌다. 길이 없는 것은 아닌데 그렇다고 해서 명확한 길도 아니었다. 계단이 있긴 했으나 녹슨 철 계단이거나 돌계단이었다. 돌계단 경우 엄청 가파르거나 사용하지 않아 수풀로 덮여 있었다. 가는 도중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간들이 보였다. 산을 오르느라 땀으로 흠뻑 젖었는데 이상하게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고 갈팡질팡한 마음에 한껏 불안해졌다. 긴장감으로 몸이 점점 굳어갈 때쯤 사람들 목소리가 들렸다. 나만 이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안도감이 생겼다. 사람들이 어디서 나타났느니 궁금해질 때쯤 자동차들이 지나는 소리가 들렸다. 괜히 반가워 발걸음이 빨라졌다. 이 길의 끝엔 무엇이 있을까? 다름 아닌 북악스카이웨이 길이었고 길 건너 원래 목적지였던 팔각정이 보였다. 도대체, 내가 걸어온 길은 무슨 길이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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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보이던 그 동네, 과연 어디었을까?


올라온 길만큼이나 내려가는 길도 만만치 않았다. 연결된 길을 따라 내려가는데 끝이 없는 거다. 어느새 해는 늬엿늬엿 넘어가고 휴대폰은 배터리가 없어 꺼져버렸다. 그때부터는 정말 직감으로만 판단하고 걸었다. 누구든 마주치면 붙잡고 물어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어찌 된 일인지 지나는 사람도, 달리는 차도 없었다. ‘도대체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그렇게 한참을 걷고 또 걸었다. 30~40분을 걸었을까? 마을버스 정류장도 보이고 사람들도 보였다. 이제 다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만의 착각이었고 또다시 끝나지 않는 길을 걸었다. ‘아까 거기서 버스를 탈 걸…….’ 후회했다. 이젠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였다. 배도 점점 고파왔다. 에라이 모르겠다며 정신 줄을 놓고 걷고 걸었더니 어느새 시야에 오밀조밀 모여 있는 건물들이 들어왔다. ‘여긴 또 어디일까?’ 당일 걸었던 길들은 온통 의문투성이였지만 갈 길을 서둘렀다. 하지만 동네 풍경이 인상 깊어 잔상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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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이라는 세계를 바라보는 세 개의 시선

그 잔상이 다시금 퍼뜩 떠오른 건 <메모리루트: 정릉읽기>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같은 정릉동이지만 총 4개의 루트, 주체, 주제로 진행되어 정릉동을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었다. 이야기의 구성에 따라 출발지, 이동하는 경로, 풍경, 분위기가 달랐다. 그러던 중에 ‘여기 이전에 왠지 와 본 것 같은데?’라는 기시감이 들었는데 북악스카이웨이 길을 걸으려다 길을 잃고 헤맸던 그때가 생각났다. 당시엔 정신이 없어 잘 몰랐지만, 집으로 향하는 동안 스쳐 지나간 곳이 바로 정릉, 508단지, 교수 단지, 아파트 단지였다. 정릉동은 지도에서 보면 정릉과 북한산을 포함하고 있어 면적이 꽤 넓다. 중간지점에 내부 순환로가 지나고 정릉천이 흐르며, 오래된 주택과 아파트 단지가 뒤섞인, 자연풍경과 도시의 풍경이 공존하고 있는 곳이라 어디서 출발해, 무엇을 보고, 어떤 지점에 주목하는지에 따라 정릉에 대해 느낄 수 있는 감각이 한없이 달라진다. 그 감각은 <메모리루트: 정릉 읽기>에서 소개된 세 가지 시선을 통해서 충분히 경험할 수 있다.



첫 번째 시선, 나의 살던 고향과 우리집

정릉동에는 시대별로 다양한 형태의 주택이 있다. 정릉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황두진 건축가는 지도 속 정릉을 찾고 1950년대 정릉동 모습이 담긴 한 장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도봉산이 보일 만큼 원거리에서 찍은 정릉동의 모습이었다. 그중에서도 석조 건물로 세워진 교회 몇 개를 소개해 줬다. 황두진 건축가는 1940년대 도시 한옥과 1950년대 부흥주택, 1970년대 2층 양옥 주택에 거주한 경험이 있었다. 1950년대 부흥주택 경우 두 채가 대칭되는 형태로 지어졌는데 이 특징 때문에 소소한 기억으로 남은 어린시절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무엇보다 이 집에는 구석구석 수납공간이 있었다. 그 다락과 벽장의 어두운 내부는 온갖 귀신과 괴물 그리고 나와 매일 싸우던 우리 누나가 등장하는 끝없는 동화 속 이야기의 세계였다. 한 때 한옥의 다락방에서 놀았던 나는 이 구석진 집의 구조가 너무 좋았다. 게다가 계단 위에는 이층침대가 있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잠자리로 여겨졌다. 당연히 천장이 낮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좋았다. 나와 그 집은 스케일이 통했던 것이다...(중략) 무엇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집이 대칭으로 된 옆집과 샴쌍둥이처럼 바로 붙어 있었다는 것이다. 옆집에 사는 내 친구와 나는 밤이면 각자의 이층침대에 누워 벽을 두드리며 신호를 보내곤 했다. <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 황두진

기억 속 동네를 걷고 유년시절에 거주했던 집과 유사한 형태의 주택을 살펴보면서 과거 정릉동이 어떤 풍경이었을지 상상해보았다. 황두진 건축가가 거주한 어떤 집은 사라졌고 어떤 집은 그 자리에 있었다. 특히 1974년부터 1989년까지 15년 동안 살았던 집은 교회 생활관으로 사용 중이었다. 이런 경우 어떤 기분이 들까? 나는 10년 동안 살았던 집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 마치 그 시절이 사라진 것처럼 큰 상실감에 빠졌었다. 그렇기 때문에 수십 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집을 보는 사람의 마음이 어떤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그 마음이 이어져 현재 황두진 건축가의 가치관과 삶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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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시선, 스카이아파트의 희로애락

이미 사라진 아파트의 존재를 인식한다는 것, 그리고 그곳에 어떤 사람이 살았고 어떤 삶이 있었는지에 대해 살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왜,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터는 공(空)의 상태로 유지되지 못하고 끊임없이 무언가로 변하거나 채워지는 것일까? 이는 삶이 순간의 과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연장선상에서 현재와 연결되고 다가올 미래와도 맞닿아 있어서가 아닐까? 2016년 장윤미 감독이 옛. 스카이아파트 철거 과정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 <콘크리트 불안>을 보았다. 스카이아파트는 1960년대 서울시 도시개발 정책으로 판자촌 철거 이후 주택공급 정책으로 건설된 아파트다. 2016년 철거 이후 그 자리에는 청년과 신혼부부를 위한 주택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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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자촌-스카이아파트-청년주택’ 시기는 다르지만 ‘주택공급’이라는 공통된 목적으로 정부가 제공한 주거 공간이다. 같은 땅에서 철거와 신축이라는 행위를 통해 과거-현재-미래를 잇는 시공간이다. 하지만, 정작 이곳에 어떤 사람들이 살았는지, 그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는 몰랐다. 스카이아파트 경우 2000년대 초반부터 건물의 상태가 좋지 않아 재개발 이슈가 있었다. 건물 철거를 위해 주민들의 이주가 요구되었지만, 이주대책이 마련되지 않은 채로 일방적인 통보를 받은 주민들이 여러 차례 항의했다. 이후 요구사항이 어떻게 반영되어 진행되었는지 알지 못한 채 10년이 흘렀는데 어찌 된 일인지 스카이아파트는 철거되지 않은 채로 있었다. 아파트에는 10명 정도 주민만 남아 있었다. 감독은 카메라를 들고 그들의 삶을 지켜보면서도 ‘스카이아파트’라는 공간 자체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철거되어야 하는 건물이지만 어떤 상황에 의해서 철거되지 못하는 상태를 ‘불안’이라는 감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화면 속 평화로운 정릉의 풍경은 밤낮으로, 위에서 아래로, 좌에서 우로 천천히, 유유히 흘러가며 안정감을 전해주지만, 스카이 아파트가 등장할 때면 왠지 모를 불안함과 긴장감으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어느 장면에서는 카메라가 흔들리는 건지, 아파트가 흔들리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불안감이 극대화되었다. 근데 이 불안감은 비단 스카이아파트만 그런 건 아닐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늘 높이 솟아오른 모든 아파트가 시간이 지나면 스카이아파트와 다를 바 없다. 세월을 무시하지 못할 테니까. 감독은 유년 시절 거주했던 아파트를 떠올리며 그 시절 친구들과의 추억, 아파트 주민들, 주민 커뮤니티 등 관계에 대한 기억을 스카이아파트라는 공간에 이식해 허구적 이야기를 담아냈다. 허구이지만 진짜 같은, 카메라가 흔들리지만, 아파트가 흔들리는 것 같은, 스카이아파트는 사라졌지만, 현재의 아파트도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이쯤 되니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짜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느껴지기도 했다. 한편으론 정작 이곳에 살던 사람들과 그들의 삶은 어디로 흩어졌는지 모르는데 현재를 사는 사람들의 삶이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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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시선, 정릉의 발레

예상할 수 있는 , 뻔하지 않은 방식으로 동네를 바라볼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찰나였다. 도대체 여기서 ‘발레’는 어떤 의미일까?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이란 책을 쓴 제인 제이콥스는 오래된 도시를 서로 다른 동작을 하는 무용수가 모여 질서정연한 전체를 이루는 발레에 비유했다. 허남설 기자는 이 관점을 통해 정릉동을 바라보고 질서읽기를 시도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조선시대 신덕왕후의 릉인 정릉, 1960년대 특수한 목적과 상황으로 조성된 주택단지, 이후에 개발된 아파트 단지 등이 섞여 있다. 교수단지와 508단지는 정릉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으며 교수단지는 2008년에 재건축사업이 시도된 적 있었다. 이때 주민들이 ‘정릉을 사랑하는 모임’을 만들어 재건축을 반대하는 활동을 펼쳐나갔다고 한다. 자연 친화적인 정릉동의 특성을 살려 골목에 정원을 가꾸고 이름을 지어 간판을 내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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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정릉은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준비하고 있었기에 재건축을 반대하는 인터뷰를 촬영하여 유네스코 센터에도 알렸다고 한다. 또 집마다 대문을 열고 자신들의 정원을 개방하여 축제를 열었다. 그 결과 재건축은 진행되지 못했고 2009년 정릉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서울의 많은 오래된 동네에서는 늘 재개발을 추진하고자 하는 흐름이 생겨난다. 마치 안 하면 안 될 것처럼 ‘낙후되었다. 위험하다’라는 식으로 낙인찍고 재개발하려는 이들이 다수다. 하지만 정릉동에서는 주민들이 나서 개발하지 않아도 주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가꾸면 얼마든지 아름다운 동네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아마도 이러한 행보를 허남설 기자는 정릉동의 ‘발레’(질서)를 재발견하는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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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그동안의 관념들을 다른 각도로 볼 필요성도 있다는 점을 제시했다. 문화유산으로 지정되는 것도 좋지만 왕조의 유산 논리로 개발을 제한함으로써 다른 방향성을 가진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다른 대안도 분명 있을 텐데? 부동산 이익이 아니라 도시 정비를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그것을 가로막고 있는 건 아닌가? 교수단지가 조성된 곳은 정릉의 능역으로 문화재보호구역이었으나 당시 대통령 지시로 택지로 불하된 점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이미 지난 일이라 어쩔 수 없다지만 서울시 송파구 풍납동 경우, 사람들이 집 짓고 살아가던 곳이 풍납토성이라는 것이 밝혀진 이후로 일부 구간은 토성의 복원을 위해 집을 철거하고 주민들이 이주한 사례가 있다. 이 방식이 옳다고 말할 수 없지만 상황에 따라 개발은 아니어도 원 상태로 복구해야 할 경우 이들 또한 비슷한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점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주민 중 더 이상 서울대 교직원이 거주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을의 이름을 ‘교수단지’로 계속 사용하는 이유가 뭘까? ‘정원’이라는 컨셉으로 재건축 반대운동을 할 수 있었던 건 교수단지라서 가능했던 건 아니었을까? 그만큼 주민 간 합이 잘 맞아서 그랬던 건 아니었을까? 서울 어디서든 다 가능했을까? 가능해지려면 어떤 방법들을 시도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공간은 매우 다양한 이해관계와 상황 속에서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변해간다. 정릉동은 그러한 세월 속에 각자의 생존 방식을 터득한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주거 공간들이 여기저기 흔적을 남겨 마침내 현재의 풍경을 완성해왔다. 우리는 그러한 시간을 한 번에 이해할 수 없고 모든 것을 볼 수도 없다. <메모리루트: 정릉읽기>에서 제안한 시선을 통해 흐트러진 조각 속에 존재하는 사적인 이야기를 따라 귀 기울이고 사라진 공간의 터를 밟아 그들의 삶이 어떠했을지 상상해 보고 그 모든 것들이 누적되어 표출된 현재의 시공간에서 정릉동의 질서 읽기를 시도해 보았다. 그들의 시선 속에서 당신만의 정릉동을 찾았는가? 당신의 정릉동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 위 글은 성북문화재단 <메모리루트: 정릉읽기> 스페셜 루트프로그램 후기로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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