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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써야 정리한 느낌 드는 사람

늙어서 그래

by 박창선

낡고 지쳤나봐. 내가 방금 뭘 하려했냐면 내 삶을 통합하려고 했어. 라이프OS라고 들어봤어요? 오예스 말고 오에스. 그런 걸 하나 구축하려 했단 말이지. 삶을 몇 개 카테고리로 쪼개바바. 뭘로 쪼개지겠어. 그치. 릴스...밥비벼먹기, 똥싸기... 아니!! 그런거 말고!!



일, 돈, SNS, 일정 뭐 그런 것들이 있을거잖아요. 보니까..alt+tab을 몇 번을 누르고 프로그램 몇 개를 켜야 내 삶이 모두 화면에 뜨더라고. 일은 노션에 정리하고 있어. 돈관리는 토스앱이랑 구글 스프레드시트로 하고 있단 말이지. SNS는 열심히 안하고 있지만 이제 해야겠단 압박에 떠밀리듯 물에 빠져드는 중이야. 일정은 구글캘린더에 쓰고 있어. 이걸 뭔가 대시보드처럼 한 눈에 볼 수 없을까?...하고 고민이 되었단 말이지.


download.jpg 나를 한 장의 대시보드로 설명하고 싶어!!

갑자기 왜 그런 고민이 들었을까. 사람이 뭔갈 정리하고자 하는 욕망은 어지르고 파괴하려는 욕망과 거의 비슷하단 말이야. 보통은 정리해놓고 파괴하거나, 파괴한 걸 정리하며 쾌감을 느끼거든. 그러니까..나는 지금 뭔가 산산조각난 기분인거지. 그래서 정리하고 싶은가봐. 상담샘도 그건 불안장애의 일종이라고 했어. 통제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걸 통제하는 거라고. 맞아. 그래서 갑자기 설거지도 한거였어!!


alyak_160704_500k_mp4_01.jpg 다 왔다. 두근거림, 답답함, 소화불량, 초조함, 두통


여튼 정리하려고 보니 작고 귀여운 줄만 알았던 마흔의 일상도 여러 정보들로 이루어져 있더라고. 개인정보라는 말에 감흥이 떨어진 요즘이잖아. 수많은 앱과 서비스는 내 삶을 엿보고 싶어해. 권한을 달래. 엿보고싶고, 듣고싶고, 다 따라댕기면서 뭐하는지 노려보고 싶대. 나는 너무도 무심하게 그러라고 했지. 수많은 앱에서 나도 모르는 나를 속속이 캐고 있는거지. 그걸 다 끄집어내서 한데모으는 건....가능은 하겠지만 너무 노가다인거야. 뿌듯하기도 하겠지만, 그닥 생산적인 일도 아니었어.


AI에게 시켜볼랬더니 이 놈은 아직 멍청한데다, 에이전트 기능을 써도 여기저기 접근권한 까진 없어서 결국 자동화로 연동을 시켜야 하는데... 그거 하다 현타와버림.


9df58d7fdec4bbf93a0539568c9d08d0.jpg 시키는 거나 잘해! 허튼 거 제안하지 말고


가장 좋은 방법이 뭔가 고민하다가 결국 펜과 종이를 들어버림. 그리고 느리지만 내가 직접 삶을 꺼내는 거지. 아주 비효율적으로 다이어리에 줄을 긋고, 점을 딱 찍은 후, 끄적끄적 쓰고 틀렸다고 찍찍 긋는 거야. 우리의 삶은 몇 개의 동그라미, 돼지꼬리, 밑줄, 점점점으로 표현할 수 있어. 삶을 표현하는 수학기호 같은 거지.


ef2ea040585bcc727955bdea236875d69e138be6.gif 물론 손이 겁나 아픔


삶은 정확하지 않더라고. 가계부앱은 포인트와 지출을 헷갈리기도 해. 방금 지출한 9,500원짜리 마롱타르트가 문화/여가 카테고리에 해당하는지, 혈당스파이크에 해당하는지 사실 나도 구분이 잘 안가. 내가 월급을 받는 것도 아니라서, 실시간으로 현금흐름을 기록하는 것도 어려워. 집요하게 카드와 통장을 쳐다보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 결국 누군가(=내가) 손으로 해야 하는 거지. SNS에 뭐가 올라가고, 뭘 올릴지 기획하는 것도 마찬가지야. 그런거 기획할 시간에 그냥 하나 더 올리는 게 낫다는 걸 알아. 꼭 공부 못하는 것들이 계획표부터 세운다고.


사람들은 삶을 한 눈에 보고 싶지만, 그건 순간일 뿐. 또 너무 적나라하게 나의 지금을 대시보드로 보여주는 것도 무서울거야. 전광판에 떠있는 실시간 성과를 코 앞에 두고 살아가는 느낌이잖아. 심지어 그 대시보드가 편하기라도 하면 좋을텐데. 뭔가 조금씩 오차가 생기면 틀린 거 찾아서 하나하나 수정하는 것도 일이거든. 그 일을 기꺼이 해낼 만큼, 삶의 진실을 굳이 숫자로 보여주는 것이 매력적이진 않은가봐.



손으로 쓰는 건 그런 허술함과 잘 어울려. 허술하지만 대충 살고 싶진 않은거지. 느리고, 비효율적이고, 비어 있고, 종이도 낭비하고, 손도 아픈 이 모든 게 어쩌면 나의 오늘과 가장 닮아있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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