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웃자고 하는 소리다. 진지하게 받지 말자.
제임스에 질렸다. 대니는 식상하고, 샐리는 흔해빠졌다. 그렇다고 신제이 굽타같은 인도계 미국인 이름을 쓸 수도 없다. 대부분의 영어이름이란 전형적인 앵글로색슨족 백인 혈통의 이름인 것이지. 위아래도 없이 할애비에게도 대니! 헤이! 라고 부르는 영어식 호칭을 쓰는 것이 수평적 문화의 상징이 된지 꽤 되었다. 그러다 문득 불경한 생각에 휩싸인다. 스타트업이든 대기업은 요즘 같이 각박한 세상에서 필요한 건 전투성이다. 똘똘 뭉친 동료애, 똑똑한 엘리트들, 민첩하고 저돌적인 성과다. 모든 스타트업이 세상을 바꾸겠다고 하는데, 이것은 혁명이다. 미끄럼틀과 레고장식이 가득한 사무실의 코끼리 빈백에 누워서 치토스 묻은 손으로 노트북을 만지던 자유분방한 실리콘밸리 정신으론 부족하다. 더 거칠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거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대니와 샐리같은 부드러운 이름으론 어림도 없다. 바이칼의 차가운 칼바람이 몰아치는 마더 러시아의 정신이라면 어떨까 싶었다.
01
우리 핵심가치는 너무 나약하다. 전격적, 총동원, 일격 등의 핵심가치를 쓰는 것이다. AI를 도입하자..이런 것도 좀 나약하다. [조직을 재건한다. 개혁한다] 또는 [페레스트로이카] 등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 '최선을 다한다, 서로를 존중한다' 이런 것도 얼마나 도덕교과서 같은가. 우린 어린이들이 아니다. 엄연한 성인이자 동지로써 자격이 있는 성인들이다. 아래와 같이 핵심가치를 바꿀 수 있겠다.
목표 = 집단적 열망
성장 = 전진, 부흥
승리 = 적의 붕괴, 영광
최선 = 격파, 타도, 결전
건강한 충돌 = 투쟁, 헌신
원팀 = 동지애, 충성, 집단
최고의 = 위대한, 영웅적 성과
지속성 = 불멸의, 필연적
비전.미션 = 역사적 사명, 불굴의 약속
02
원팀이란 단어를 강조하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모두 프롤레탈리아 계급이기 때문에 남녀노소,팀장팀원 등 계급과 직무, 부서 할 것 없이 모두 평등하다. 호칭뿐 아니라, 서로가 동등하게 [이보게, 저보게, 그대, 동지, 당신]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03
TF가 아니고 급진적 분파라고 불러보자. 또는 아방가르드 정도도 좋겠다. 조직문화 전파자도 나약하게 [주니어보드나 CA]라는 단어가 다 무언가. 아방가르드 또는 선전 집단이라고 불러볼 수 있겠다.
04
혁신아니고, 혁명
05
서로를 부르는 이름은 더욱 시베리아스럽게 바꿔보자. 샐리? 약하다. 예카테리나 정도는 되야지. 타미? 안돼. 타미는 일 끝나고 스텔라맥주 먹으면서 페퍼로니 피자 사들고 밀린 시즌 미드 볼 것 같은 이름이야. 이반. 드미트리, 블라지미르. 정도로 불려야 할 것이다. 기본적으로 권총을 차고 있을 것 같은 포스가 느껴진다. 자욱한 안개 사이에서 발목을 덮는 코트깃을 고독하게 세우고 눈발 날리는 가로등 아래로 홀연히 사라질 것 같다.
06
서로를 부를 때를 생각해보자. 우린 흔히 누구누구님이라고 하는데, 이건 너무 거리감 느껴져.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블라디미르, 자네는 요즘 어떠한가. 후후... 차기년도 KPI를 세우느라 정신이 없겠군. 또 니콜라이 동지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겐가?
이보게 보바. 날 조롱할 시간이 있다면 자네의 작전부터 잘 관리하길 바라네. 최근 고객 유입쪽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보이던데, 내가 데이터를 지켜보고 있단 사실을 잊어선 안될 것이네.
허허, 블라디미르 그게 무슨 소린가. 내 정보원에 의하면 유입쪽은 한치의 오차없이 혁명적일세.
이처럼, 서로의 이름을 소탈하게 부르며 의심과 협박의 어조를 은밀히 담아낸다. 당장이라도 허리춤에서 총을 꺼낼 것 같은.
07
탕비실의 과자를 보자. 엄마손파이? 아몬드 빼빼로? 이런 걸로는 전투적 목표를 이룰 수 없다. 스미노프와 발티카 맥주와 칩스면 충분하다. 깔바사의 꼬리한 냄새가 탕비실에 한가득 풍기며, 조명은 자욱할 수록 좋아보인다.
08
이메일도 더욱 감성적으로 써진다.
[오오! 옐레나. 나의 동지. 다정한 그대의 데이터 파일을 무사히 수령했어. 기민하고 통찰이 가득한 숫자들을 벗삼아 오후를 보내고 있어. 다소 무례하지만 나는 그대에게 하나의 청을 더 하고 싶어. -이것이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는 어두운 유저시나리오의 폭풍 속에서 이탈의 흔적을 찾고 있어. 이것은 교화소의 악질 간수같은 니콜라이의 저열한 명령이야. 설령 그의 의지가 아니라고 해도 아무래도 상관없어. 옐레나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나를 용서해줘. 그대가 지닌 나머지 자료 중 이탈의 요소가 될 만한 것을 빠짐없이 모아줘. 이것이 나의 마지막 청이 되길 바라. 시린 시베리아의 벌판에도 프리메로즈의 향은 매번 피어나지. 머잖아 야근의 눈폭풍은 멎게 될거야. 그때까지 강건하길. 친애하는 나의 동지, 옐레나 그대의 답장을 기다리며]
09
서롤 더욱 존중하거나 더욱 진솔하게 싸울 수 있다. 누구님 누구님하면서 싸우면 뭔가 더 기분나쁘거든. 괜히 돌려서 꼽주는 것 같다. 존댓말로 싸울 때 그 빈정거림 비슷한 거 알지? 아니 그건 제가 알겠는데요... 뭐 이런 짜증섞인 그런 말투가 더 거슬리거든. 하지만, 러시아이름이라면 그런 짜증이 아니라, 격한 분노가 더 잘 어울린다.
책상을 치며 [이보게!! 그게 무슨 말인가!! 당치도 않는 소리!!] 라고 멱살을 잡을 수도 있어보인다.
[한 번만 더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면 조직 목표의 배신자로 간주하겠어] 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또는 [젠장! 체호프! 언제까지 내가 이런 소릴 듣고 있어야 하지?] 라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도 될 것 같다.
10
원온원과 피드백도 더욱 진지해질 것 같다.
둘은 흔들리는 삿갓등 아래, 차가운 철제 책상을 가운데 두고 삐걱거리는 의자에 마주 앉았어. 조용히 시가를 피우고 있지. 팀장인 니콜라이가 먼저 나지막히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입을 열었어. [후우... 마른 나뭇가지처럼 앙상해졌군.]
무심한 듯 맞은 편의 스미르노바가 다리를 꼬며 대꾸했어. [니콜라이, 우린 둘 다 늘어져있고 비척대고 있어. 삶의 아픔보다 더 고통스러운 게 뭔줄 알아? 어제 캠페인을 릴리즈했는데, 예상치 못한 수백만 조회수에 놀란 기분을 이해해? 그러나 그게 모두 허수였다는 걸 보고해야 하는 기분을. 힘껏 당긴 밧줄과 함께 끊어진 기분이지.]
11
기획안도 더욱 심플해져. 러시아 문학처럼 첫 줄에 모든 걸 담지
[최악의 아이디어, 그러나 최고의 현실성이었다.]
[행운은 여기까지였음을, 반토막 나버린 전환율이 말하고 있었다.]
[우리가 비용을 더 쓰지 않았음에도, 매출이 났던 그 순간. 무엇가 잘못됐음을 눈치챘어야 했다.]
이런 식으로 두괄식이 될거야.
이렇게보니, 회사생활은 목표에 반대하는 조직의 배신자를 처단하기 위해 치밀한 정보전과 급진파와 온건파의 숙청싸움이 계속될 것 같다. 모두가 허리춤에 찬 권총을 꺼내고 차가워진 동료의 시신에 보드카를 부어주는 거친 하루하루가 되겠군. 혁명노선에 전격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나약한 동지는 아직 얼지 않은 바이칼 호수를 쓸쓸히 걸어가야 할지도 몰라. 안되겠다. 그냥 영어이름을 계속 쓰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