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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삶분의 일

데이터 기반의 대화는 어떻게 헛소리가 되는가

우리 데이터로 대화하고 결정해요! 라는 말이 무너지는 이유

by 박창선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알 순 없다. IT테크 기업의 범람과 애자일이라는 유령같은 방법론이 시장에 떠돌기 시작한 그 맘때인지. 아니면 테일러리즘이 사람을 옥죄었던 그 때부터 이미 시작된 것인지. 데이터란 단어는 묘하게 마음을 안정시켰다. 인간은 늘 불안정하고, 확신을 가지기엔 용기가 모자랐으며, 상대를 설득하기엔 힘이 부족했다. 모두가 각자의 이해관계를 주장하는 공간에서 데이터란 모두의 입을 닥치게 하기에 꽤나 훌륭한 도구처럼 보였을 것이다.


근거가 뭐죠!! 데이터가 있나요?! 확실한 증거가 있나요?!
다운로드.gif 데이터 있나요!! 근거 있나요? 근거 내놔!!! 증거물 찾아!!

팀장이든 팀원이든 특검처럼 쏘아붙이기에 데이터만한 것이 없었을 것이다. 데이터의 해석이나 분석은 둘째 문제다. 이것은 증거있냐고 소리지르며 논리를 따지는 청문회 숏츠같은 것이다. 나는 논리적이며, 굉장히 이성적인 사고를 통해 너의 의견의 허점을 발견해주겠어. 깊숙한 저변엔 이런 것들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내가 누군가를 설득할 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번엔 공격이 아니라 방어의 용도로 쓰였을 것이다. 나를 날카롭게 쏘아보는 팀원들 사이에서 나의 직관을 주장할만한 야수의 심장을 지니긴 쉽지 않다. 2019년 2,400명의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인크루트 주관 설문조사라면 든든할 것이다. 캠브리지 대학의 경영학 교수가 주장한 이론이라면 더욱 어깨가 펴질 수도 있겠다. 부족한 확신은 지식으로 힘을 얻는다. 사실 그게 나의 주장과 이번 프로젝트의 본질과 맞닿아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숫자와 전문가, 기관의 이름으로 보증되었는가가 중요할 것이다.

467779925_17887770345135551_5414257190816553407_n.jpg 좋아, 나의 어깨엔 강한 데이터가 있어!


여기에 '내가 데이터를 해석한다'는 착각까지 더해지면 데이터드리븐의 효과는 더욱 대단해진다. 최근 고객 데이터에서 누구든 우려할 정도로 체류시간이 줄어들었다. 이제 이 단순한 사실은 마법봉이 될 것이다. 이슈는 이미 등장했고, 갖다 붙이면 무엇이든 이슈의 근거가 될 수 있었다. 불안 앞에선 따스한 동풍마저도 재앙의 징조같아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데이터는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우린 현상과 인상과 해석의 간극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현상과 해석의 웃지 못할 상관관계를 지난 국내 불장시기 기영이 투자법, 앞구르기 투자법 등을 통해 경험한 바 있다. 엘리엇파동이론은 명함도 못내밀 기가막힌 페이소스였다.


55.jpg 엉덩이의 상단에서 사면, 기영이가 벌떡 선다!



데이터는 죄인인가? 데이터 드리븐은 허상이었나. 물론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나로호도 HBM도 제미나이3.0도 모두 데이터에 기반해서 등장했고 성공했다. 고객 유형을 심층적으로 분석해서 맞춤형 알고리즘을 만드는 것도 모두 데이터의 역할이다. 넷플릭스의 썸네일 바리에이션 전략이나, 토스의 UX집착은 훌륭한 데이터드리븐의 선사례가 될 수 있다.

그럼 뭐가 문제인가. 사람이다. 데이터로 대화하자면서 논리쟁이 코스프레를 해대는 과몰입 대문자T 팀장님이나, 설명을 길게 들을 의지도 없는 실장님의 '데이터로 짧게 얘기해' 따위의 나태한 태도가 문제인 것이다.

또는 직관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 어줍잖은 일잘러들의 면피수단이 되어버리거나, 부사장님께 보고해야 하는데 그 분이 '숫자'를 좋아하셔서 대강 때려맞춘 통계와 복잡한 소수점들의 향연들이 데이터의 진짜 가치를 발로 차고 다니는 것이다.

뭘 봐야 하는지 갈 곳잃은 동공으로 머리를 긁적거리는 팀장과 업데이트도 통합도 2022년에 멈춰버린 인프라, 그런 걸 깡그리 무시하고 냅다 핵심가치에 데이터드리븐을 박아버린 경영진이 만드는 앙상블을 떠올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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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로 얘기하자고 하지만, 실제로 그 정도로 리얼타임 데이터를 쌓고 있긴 한건가? 정확히 A와 B가 어떤 관계에서 작동하는지 트래킹 해본 적이 있나. 실제 피드백과 지시, 회의에서 우리가 그렇게 일상적으로 데이터 얘기를 하고 있나. 애당초 태어나서 뭔가를 이야기할 때 데이터를 사용해서 얘기해본 경험이 몇 번이나 있나.

일상에서 데이터를 늘 바라보고, 이를 해석하고, 해석을 나누고, 해석을 합의로 만들기까지의 과정은 진심 과장 안보태고 존나 어렵다. 저급하지만 이 단어 외에는 당최 설명할 길이 없겠다.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설령 완벽히 해낸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의 성공을 보장하진 않는다. 데이터 드리븐이 성역이자 진리인 것도 아니다. 데이터는 그저 흘러간 숫자고, 유추의 기반이자, 수많은 가능성을 담고 있는 언박싱 전 슈뢰딩거의 고양이일 뿐이다.

오히려 우리가 데이터드리븐을 얘기하는 건 역설적으로 '무례함'과 '개소리' 때문일 것이다. 스파이더 찌리리같은 털 끝의 소름과 갑자기 찾아온 우주의 기운, 내 마누라가 디자이너라서 내가 잘 아는데...로 시작하는 말같지도 않은 '취향과 감'이 부른 극도의 피곤함에 지쳤다.


이럴거면 모두 입다물고 숫자로 얘기하자는 얘기로 흘러가는 것이다. 능력없는 소수의 리더가 자리만 꿰차고 있고, 잘난 척하며 이빨까기 좋아하는 논리쟁이가 무능력한 그들의 기를 누르는 장면은 꽤나 카타르시스가 있었을 것이다. 너도 나도 유행처럼 모두가 데이터드리븐을 외치지만, 정작 그 데이터가 어디에 쌓여있는지 뭘 봐야 하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우주적인 취향과 참신한 개소리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것보단 애매한 숫자들 사이에서 방황하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는 판단이었으리라.


데이터를 부르짖기 전에, 우리 회사는 왜 데이터 없인 당최 대화가 안되는지 먼저 살펴보자. 데이터를 맹신할 거면, 현상과 데이터의 역학관계를 제대로 알자. 아니면 모든 것을 숫자로 이해하는 고대 일루미나티처럼 확실한 컨셉충이 되자.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잖아. 사업의 대부분은 범접할 수 없는 센스와 직관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혁신과 놀라운 서비스는 [그건 존나 망할 것이며, 근거없는 개소리]라고 놀림받았던 것들이다. 어느 것 하나도 다수의 논리적 지지를 받으며 탄생한 새로움은 없다. 우리는 서로의 직관과 본능을 존중하고 있나. 과거의 데이터를 질책이 아닌 팩트로 바라보고 있나. 반성과 남탓을 제대로 구분하고 있나? 우리가 보고 있는 숫자들은 하나의 방향성을 향하고 있나. 우리 회사는 설득과 토론이 가능한 곳이긴 한건지. 숫자가 아닌 서로의 생각도 데이터만큼 고귀하게 여겨지는지.


우리가 숫자보다 먼저 마주해야 하는 건 그런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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