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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사원 D May 29. 2022

10. 르라보 좋아하는 편!

르라보와 니치 브랜드

내가 실용성과 무관하게 그저 갖고 싶어서 가지고 있는 유일한 물건 - 한 마디로 사치품 - 이 바로 르라보 향수다.


르라보는 몇 해 전에 지인이 갖고 있던 상탈 33이란 제품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호기심에 한 번 뿌려보고는 질색팔색을 했었다. 무슨 걸레 썩는 냄새 같은 게 확 올라오는 게 아닌가. 그런데 말입니다, 집에 가는 지하철 어디선가 심신이 안정되는 나무 향이 나는 게 아닌가. 코통 사고를 당해버린 것이다.


르라보는 다 이런 식이다. 개성이 강한 탓에 열에 아홉은 초면에 나가떨어진다. 하지만 잔향에 주파수가 일치하는 순간 그야말로 중독되어버린다. 누군가 그랬다. 르라보는 간택 당해야 쓸 수 있다고.


르라보에는 특유의 그 나무향이 있다. 제품끼리 서로 95%까지는 다르지만 나머지 5%가 그 나무향이라 결국은 르라보 향으로 부를 수 있는 같은 결로 마무리된다. 밖에서 신나게 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랄까.


이번에 구매한 베이 19도 마찬가지다. 이건 무슨 꿉꿉한 지하실도 아니고 타이어 고무나 아스팔트도 아닌 희한한 '냄새'로 시작해서 사람 나가떨어지게 한다. 그래도 끝끝내 버티는 사람에게는 숲과 흙을 머금은 자연의 향을 선물한다. 그리고 어김없이 르라보 결로 마무리된다.



높은 진입장벽과 극적인 변화, 그리고 은근한 일관성은 니치 브랜드로서 르라보의 소구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니치 브랜드를 찾는 이유는 결국 남과 다른 나를 표현하고픈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르라보는 이런 맥락을 제품 내적으로 충실하게 구현하면서도 정체성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다. 


물론 실험실 컨셉의 공간과 라벨링 서비스도 니치 브랜드 르라보의 특징이지만 핵심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주얼 요소는 가장 기본적인 차별화 요소이며 외적으로 아이덴티티를 확립한 브랜드는 르라보 말고도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반적인 향수 소비 패턴을 생각해보면 고객 접점보다는 제품 내적인 차별화에 무게추를 조금 더 두는 편이 본질적인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여담이지만 매거진 B 르라보 편에서는 이런 제품 내적 차별화에 대해서는 별로 다루지 않아서 좀 실망이었다. 구글링 하면 뻔히 볼 수 있는 제품 소개에 르라보 본사 집기가 원목이라는 잡다한 이야기만 가득. 르라보 사보가 아닌가 싶었다. (맞다. 매거진 B 별로 안 좋아한다.)




이제와 고백하자면 베이 19 또한 향이 좋아서 산 건지, 일단 사놓고 적응하려는 심산인지 잘은 모르겠다. 이런 자기 세뇌를 속된 말로 뇌이징이라고도 하던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상한 브랜드다.


그래도 흥미가 있는 분들께는 입문용으로 베르가못 22를 추천한다. 가장 호불호가 없다. 

베스트셀러는 상탈 33과 떼누아 29다. 쌀쌀한 계절에 어울린다.


내 기준 가장 높은 진입장벽을 가진 제품은 어나더 13이다. 잘 맞는 사람에겐 살결같은 포근한 향이, 아닌 사람에게는 피 비린내 또는 쇠 냄새가 난다. (불행히도 나는 후자였다..) 절대로 블라인드 구매하지 마라. 정말이다. 난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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