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 log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회사원 D Oct 04. 2022

11. 내 손에 쥔 게 온전히 내 것은 아님을

'비비안 마이어 사진전'을 보고 든 생각

어떤 여자가 있다. 

키가 큰 그녀는 주로 꾸안꾸 스타일이다. 남자 셔츠를 대충 걸치는가 하면 빈티지 블라우스도 즐겨 입는다. 

그녀의 취미는 사진이다.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시간 날 때마다 주변 풍경과 사람들을 열심히 찍는다. 이렇게 쌓인 사진이 자그마치 10만 장이 넘는다. 

결혼 생각은 딱히 없다. 굳이 집을 사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보모나 간병인 일을 하면서 모은 돈으로 가끔 여행 다니는 게 삶의 낙이다. 여행지에서도 사진은 못 참지. 그녀는 오늘도 라이카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선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MZ세대 누군가 이야기 같다. 하지만 주인공은 무려 1926년 생(!) 아마추어 사진작가 ‘비비안 마이어’다.


성수동 전시장에서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을 접하고 받은 인상은 바로 굉장히 현대적이라는 점이다. 1950~60년대 사진임에도 구도나 색감, 그리고 감성들이 요즘 활동하는 프로의 작품 같았다. 아니 속된 말로 딱 ‘인스타그래머블’했다.


그녀의 라이프 스타일을 상징하는 키워드 - 비혼, Geek worker, 취미, 사진, 여행 - 또한 그야말로 요즘스러웠다.


그녀가 MZ라면 어떨까.


틈틈이 찍은 사진을 SNS에 올리고 가끔 블로그에 소소하게 사진 이야기도 포스팅했을 것 같다. 재능 있는 사람이 10만 장을 넘게 찍을 정도로 열정과 꾸준함까지 갖췄으니 업계 관계자 눈에 금세 띄었을 것이다. 그렇게 전업 사진작가가 되어서 더욱더 활발한 창작활동을 하지 않았을까.


Self-Portrait, 1956
September 26, 1959. New York, NY
October 31, 1954. New York, NY


하지만 그녀와 그녀의 작업물은 - 자의 반 타의 반이기는 했지만 -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말년에는 노숙자와 다름없이 살다가 결국 홀로 생을 마감했다. 주인 잃은 사진들은 창고와 경매장을 떠돌았다. 우연히 발견한 어느 청년이 페이스북에 올리지 않았다면 아마도 영원히 어둠 속에 묻혀 있었겠지.


사후에 공개된 그녀의 사진에 대한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뉴욕 타임즈, 뉴요커, 보그 등 주요 언론들이 앞다퉈 소개했고 전 세계에서 전시회가 열렸다. 그녀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졌고 오스카에 노미네이트 되기도 했다.


그녀에게 재능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가능성의 실현이 늦었던 이유는 그저 너무 일찍 태어났다는 것.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그것 하나뿐이었다.


우리 대부분은 자신의 성과를 오로지 자기 힘으로 이룬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머리 터지게 생각한 아이디어고, 내가 열심히 했고, 내가 노력한 덕분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이룩한 그 어느 하나도 온전한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 모두는 정도와 분야의 차이는 있지만 어쨌든 일정한 재능을 가지고, 그것도 한반도 북쪽이 아니라 남쪽에 태어났다. 출발 자체가 굉장한 행운이다. 


내 어머니는 부자는 아니었지만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동네는 평범하고 재미없는 곳이었지만 그 말인즉슨 안정적이란 뜻이었다. 도시 곳곳에 학교가 있어 필요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좋은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난 덕분에 문제없는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졸업한 후에는 가능성을 알아봐 준 회사가 있어 사회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일 잘하는 사수, 존경스러운 대표님을 만나 여러 가지를 배우고 또 성장할 수 있었다. 이 시국에도 회사가 건재해서 월급 밀릴 걱정 없이 생활을 꾸려갈 수 있었다. 


얼마 전에는 코로나에 감염되었다. 하지만 의료 시설과 종사자들 덕분에 별 탈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내가 현재를 살아가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건 이렇듯 많은 행운과 도움 덕분이다.




개인의 능력과 노력의 가치를 폄하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무리 많은 행운이 있어도 내가 노력하지 않으면 소용 없는 거니까. 


그저 내가 성취한 것들이 100% 내 능력 덕분만은 아님을. 그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타인의 도움과 보호를 받았음을 인지하자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손에 쥔 것에 관해 겸손하다. 삶의 다양성과 우연성을 인정한다. 타인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다. 인간에 대해 따뜻한 시각을 가지고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생각한다.


그러니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는 적지 않은 행운이 있었음을, 마냥 내가 잘나서 잘된 것이 아님을, 우리 서로가 도움을 주고받고 있었음을 생각하자. 최소한 노오력 타령하는 꼰대가 되는 일은 피할 수 있을 테니. 


사진전 보고 별 생각을 다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10. 르라보 좋아하는 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