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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racle monica Oct 27. 2021

8개월 차 ; 걷기 예찬

자연주의 태교법 - 느릿느릿 걷고 또 걸으며

걸으며 보는 일상적 풍경






어느덧 임신 말기에 접어들었다. 부른 배도, 밤마다 옆으로 누워 자는 일도 제법 익숙해진 듯했다. 배꼽 위 세로로 길게 그어진 임신선도 이제는 어색하지 않았다. 뱃속 사랑스러운 아기의 태명도 스스럼없이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부족하기만 한 초보 엄마에게 와 준 내 아가에게 사랑한다고 하루에도 열 번 이상 자주 이야기해주게 된 것도 일상에 생긴 사소로운 변화 중의 일부였다.



여전히 불편한 것도 물론 많았다. 식사에 있어 평소 양보다 조금이라도 많이 먹는 날이면 속이 더부룩했다. 그냥 삼시 세끼가 기본적으로 소화가 잘 되지 않았다. 시원한 아메리카노도 마음대로 마시지 못하는 게 그 이유 같았다. 의사 선생님은 하루에 1잔 정도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여서 마음 놓고 편히 마시지 못했다. 조금씩 불러온 배 때문에 허리와 골반이 뻐근하고, 자주 욱신거리기도 했다.



사실 몸의 변화보다 더 힘든 건 내 것 맞나 싶은 감정이었다. 기분이 하루 종일 롤러코스터를 탔다. 괜찮다가도 이유 없이 몸 상태가 처지기도 했다. 막달까지 버텨야 하니 잘 먹고, 스트레스 절대 받지 말아야 한다는 양가 부모님의 우려와 걱정도 쉬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모두와 관심과 걱정이 괜한 잔소리 같았고, 기분이 울적한 날에는 먼저 안부도 자주 안 물어주는 무심한 남편이라며 괜히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자주 짜증을 부렸다.   

  


스스로 통제가 되지 않아 어찌할 수 없는 우울과 권태가 자주 치밀어 올랐다. 부담스럽지 않은 정도로 업무도 줄여서 맡았는데, 그마저도 책임지고 싶지 않은 날에는 그냥 휴가를 내고 도망갈까 싶기도 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기는커녕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 싫고, 축축 처지는 날도 많았다. 바닥을 맴도는 기분에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내가 주인인 줄 알았던 나의 바이오리듬은 어느새 큰 폭풍우가 몰아치는 마냥 시도 때도 없이 나를 쥐락펴락 흔들어 놓았다.



그때마다 나는 기어코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 걸었다. 걷기는 크게 힘들이지 않고도 실천할 수 있는 만능 처방전이었다. 그래서 임신기간 동안 몸 상태가 허락하는 한 자주 걸었다. 특히 몸이 급격히 무거워지고 배가 불룩 나오는 요즈음 많이도 걸었다. 1만 보는 기본, 한번 내켰다 하면 2만 보 이상도 걸었다. 무거워진 몸에 부어있는 발바닥과 종아리가 조금 아프긴 해도, 걸을 때의 홀가분한 기분이 참 좋았던 것 같다.



내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내 생각도 흐르기 시작한다. 미국의 사상가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걷기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는데 내가 딱 그랬다.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도 정신이 몽롱해질 때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사무실이 있는 10층까지 무념무상으로 계단을 올라 걸었다. 퇴근 후 가벼운 저녁을 먹은 후 어김없이 근처 한강 공원을 누볐다. 우선 걷기만 시작하면 쉬이 안심이 되었다.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던 나쁜 생각과 나를 힘들게 한 모든 것들이 모두 송두리 흘러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걸을 때는 걷기에만 집중할 수 있어 참 좋았다. 걷기만 시작하면 온갖 슬픔과 짜증, 힘듦의 감정이 빠진 그 자리에 막연한 긍정이 차올랐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출산의 데드라인을 앞두고도 뭐든지 다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차갑고 상쾌한 초저녁의 공기를 헤치며 앞으로 앞으로 쉬지 않고 걸었다. 아직도 아득하기만 한 출산과 출산 이후의 일상과도 이렇게 함께 적당한 속도로 걸어 나갈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는 생각도 했다.



최대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뱃속 코어 근육에 집중해 걷고 있는 이 순간이 참 행복하다. 근심 걱정이 없고, 마음이 편안한 상태. 걷고 있을 때 내가 그랬다. 나에게 찾아온 힘들고 우울한 마음, 처지고 무거워지는 몸을 불편하다고 피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나의 연약함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용기가 생겼다. 뭐 어떻게 해서든 잘 지나가겠지 하는 어렴풋한 자신감이 생기는 것도 같았다.



걸으며 무엇보다도 더 좋은 사람이, 더 나은 엄마가 되기 위해 계속 노력하기로 했다. 이 고양된 감정이 고스란히 아기에게 전달된다고 생각하니 기분까지 좋아졌다. 거창한 사색까지는 못해도 그냥 지금 이 순간에 오롯이 집중하며 건강하게 뱃 속 아가와 함께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니 내가 매일 걷지 않을 수가 없다.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 걷는 것은 잠시 동안 혹은 오랫동안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다비드 르 브르통 산문집 걷기 예찬』, 현대문학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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