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당신이 상상했던 삶을 살기 시작할 시간입니다. It's time to start living the life you've imagined.
헨리 제임스 Henry James (1843-1916)
누군가 그랬습니다.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마음을 갖는 게 바로 모든 여행의 시작점이라고. 짧으면 짧고, 길면 길다고 할 수 있는 1시간 남짓의 점심시간. 저는 무조건 떠나는 듯한 마음을 먹고 회사를 나서곤 합니다. 집을 한껏 어질러 놓고 치우지 않은 아이들에게 일방적인 화를 쏟아낸 후 씩씩대며 혼자 정리했던 어제의 억울함도, 자꾸 나에게만 던져지는 부서의 잡일에 왜 나만!이라는 월요일 아침의 분함도 우선 그 현장을 떠나고 난 후에는 아주 잠시라도 그 출렁대던 마음이 소강상태로 접어들더라고요.
강신재 <퓨처 디오라마> 옛 서울역의 중앙홀을 그대로 압축하여 투영하는 둥근 파노라마 구 주변을 질주하는 기차모형
이번 점심시간에는 가까운 서울역으로 향했습니다. 2003년 신 역사로 기차역의 모든 기능이 옮겨진 이후에 오래된 구 역사는 '문화역 서울 284'라는 이름의 복합문화공간으로 변모했는데, KTX 개통 20주년 기념 철도문화전《여정 그 너머Journey Beyond Plus》 (24.03.29~4.21)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KTX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예술작품과 철도박물관 소장품을 주제별로 나눠 소개하는 전시였고요. 기간이 거의 끝날 즈음이고, 또 평일 점심인지라 인파는 그렇게 많지가 않아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문화역 서울 284는 서울에서 무척 애정하는 전시공간입니다만, 이번에는 전시에만 조금 더 집중해보려고 합니다. 중앙홀, 1/2/3등 대합실, 부인 대합실, 역장실, 귀빈예비실, 귀빈실, 복도, 그릴, 그릴준비실, 소식당, 구회의실 등 각 공간에 대한 이야기는 추후 더 풀어볼게요.)
<KTX 사진전> 9명 사진작가들의 철도를 주제로 한 사진작품들로 열차를 형상화 한 작품
전시실에서는 KTX와 떠남, 현대적 기술을 주제로 다채로운 작품들이 반겨주고 있었습니다만 (체험형 설치, 20여 년간 실제로 운행되었던 KTX 열차 모형, VR 및 인터랙티브 영상, 실제 사용되었던 철도 박물관 소장품 아카이브 등) 저는 그중 2층 그릴, 옛 양식당 공간에 넓게 펼쳐진 9명 작가들*의 사진들이 제일 인상에 남았습니다. 철컥 거리는 슬라이드 필름 영사기에서 흘러나오는 아날로그 사진 하나하나를 기차 창 밖 풍경인 듯 후루룩 지켜볼 수 있었고요. 문득 여행이란 매 순간 온 힘을 다해 내 능력과 열정을 짜내지 않더라도 스쳐가듯 새롭고 낯선 풍경을 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1층의 귀빈실에서는 정겹고도, 손 때 묻은 철도박물관 소장품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역대 철도 종사사들이 실제로 입었던 유니폼과 독특한 폰트의 완장. 검표 가위, 스마트폰으로 모바일 승차표를 사용하기 이전의 종이 티켓 발권기까지. 새마을호, 통일호 기차표를 보니 어린 기억 속 명절 때마다 큰 집으로 내려갈 때의 기억이 어렴풋이 들더라고요. 깜깜한 터널을 지날 때면 3살 터울의 오빠와 숨을 멈추고 누가 오래 참나 터무니없는 내기를 했던 추억도 떠오릅니다. 군침 도는 간식으로 가득했던 스낵 카트가 지나갈 때면 오징어를 사달라고 엄마를 졸랐더랬지요.
오래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있는 과거의 철도 관련 오브제들
KTX 20주년 기념 캐릭터 고기철 굿즈상점
전주식당 백반 한 상
문화역 서울 284와 현 서울역 뒷 편의 청파동에는 백반집이 많습니다. 17년에 개장한 서울로 7017의 공원길이 시작하는 초입 부근으로 새로운 음식점들, 카페도 많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다가구와 원룸, 소규모 공장들과 공업소가 몰려있는 동네 안쪽으로는 여전히 개발 이전의 옛 모습이 많이 남아있더라고요. 동네를 이곳저곳 둘러보다 우연히 발견한 전주식당에 들렀습니다. 매일 다른 식단으로 제공되는 백반이 무려 7천 원이라니요.
제철나물과 김치만 있어도 호사인 밥상에 뼈해장국은 기본이요 야채 전에 게마늘쫑 절임, 달래무침까지 푸짐한 봄 가득 한 상이 차려졌습니다. 이런 밥상이면 그 다채로움을 다 맛보러 매일 출근 도장 찍어야 할 것만 같은 마음입니다. 기차역에서 한 껏 설레었던 마음은 정갈하면서도 정성 가득 차려진 밥상 앞에서 최고조에 달합니다. 엄마가 된 후에야 비로소 제대로 된 밥 한 끼 차려내는 게 얼마나 힘들고 손이 많이 가는지 제대로 깨달았기에 이 한 상, 한 끼가 무척이나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제육볶음도 무척 맛나다고 하네요!)
매여있기에, 책임이 있기에 그만큼 막중한 일상의 무게도 아주 잠시 내려놓고 순간에 집중할 수 있는 여행이 매혹적인 듯합니다. 오늘만큼은 KTX를 타고, 한껏 절정인 봄꽃과 신록 구경을 하러 저 멀리 훌쩍 떠나고픈 마음도 들지만 어느새 돌아갈 시간이 가까워져 오니 아쉬운 마음이 가득 합니다. 해당 전시는 이미 끝났지만,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마음이 그리워질 때 그리고 새로운 전시의 시작이 궁금해질 때 다시 한번 문화역 서울 284와 전주식당에들러야겠습니다.
Compartment C Car, 1938 by Edward Hopper (https://www.edwardhopper.net/compartment-c-car.j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