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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lein Mar 29. 2024

마음에 감정이 남는다는 것

감정을 남긴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 퇴근 중 계단을 내려가다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핑하고 도는 느낌이 났다. 간신히 운전을 해 집까지는 왔지만 어지러움은 멈추지 않았다. 누워있다 일어나면 온몸의 피가 아래로 쏠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힘이 빠지고 구역질이 올라왔다. 다음날 병원에서 검사를 했다. 의사는 이석증이라고 했다. 다행히 일요일 오후 구역질이 멈췄다. 그러나 어지럼증은 여전했다. 


월요일 아침에도 어지러웠다.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출근을 했다. 그 후로 주중은 출근을 하여 어찌어찌 견디고 주말에는 집에만 있었다. 집안일을 했지만 오래 하지 못했다. 약은 정신을 몽롱하게 했다. 무언가를 하려 해도 의욕이 떨어졌다. 그렇다고 먹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할 수 있는 건 누워 있는 것이었다.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다 영화를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영화는 탈북한 남자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여자의 이야기였다. 영화를 보기 전 어느 블로거의 평을 보았다. 평은 급박한 전개가 아쉽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난 후 전개과정이나 작품성 같은 영화적 요소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영화의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오직 영화 속 감정만 남을 뿐이었다. 주인공의 어머니에 대한 마음과 우연히 만난 어느 여자와의 사랑에 대한.


영화를 보고 나서도 감정은 가시지 않았다. 달나라만큼 멀어 당장 갈 수 없는 곳에 있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마음이 뭉클했다. 예전에 있었는지 없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감정. 그 감정이 무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굳이 얘기를 해 본다면 그리움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리움의 근원은 사랑일 수도 있고 애증일 수도 있고 후회일 수도 있다. 모든 감정들이 섞인 세상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사춘기 소년처럼 머릿속에 가득 차 손에 잡힐 것 같지만 실제로는 실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그래서 그림으로 그릴 수도 단어나 문장으로도 말할 수 없는 감정.


나는 그 감정이 싫지 않았다. 그런데 걱정이 되었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격정적으로 휩싸여도 시간이 지나면 감정은 점차 식어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식어가는 감정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애쓸 것이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아주 많이 애쓰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알고 있었다. 완전히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감정은 희망처럼 작은 씨앗이 되어 마음에 자리를 잡고 있다가 예상 못할 상황에서 자라고 커져 마음을 덮을 것이란 것을.


마음에 남는다는 것은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억은 봄꽃 가득한 화려한 수채화 같다. 그림에 물이 묻으면 꽃들의 형체는 무너지듯 시간의 물에 희석되어 희미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번져버린 그림이 어느 순간 맑고 선명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묵직하니 정말 이때다 싶을 만큼 결정적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아닌 아주 사소하고 가벼운 몸짓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기억은 지나간 일이지만 우리를 기대하게 한다. 언젠가 한 번은 보거나 겪어 본 것처럼 느껴지는 것처럼 돌고 도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현실 속에서 선물처럼 나타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한다.


머리가 한결 편해졌다. 어지러움이 많이 가셨다. 머릿속에 있던 거대하고 육중한 덩어리가 사라진 것 같다. 생각해 보니 영화를 보고 나서부터 그런 것 같다. 마음으로부터 소환된 우연한 감정은 나의 뇌를 자극시켰다. 모든 병의 근원은 마음이라고 한다. 나는 마음이 아팠을지도 모른다. 마음이 어디가 아픈지 모르는 나에게 신호를 보낸 것인지 모른다. 마음은 간직하고 있던 씨앗을 터트려 아픔을 잊게 해 주었다. 공포나 두려움, 증오나 복수처럼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라면 감정을 남긴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아름답고 기쁜 감정은 물론이고 슬프고 애처롭고 안타까운 감정도 마음에 기억되고 간직되어 보이지 않는 상처를 아물게 해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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