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같던 내 인생에 무언가 하나씩 칠해져가면서 어른이 되어간다고 생각한다.
내 인생에 그렇게 특별한 것들이 있고, 패션 역시 어느 순간 나에게 백화점이나 옷가게에 가서 둘러보는 게 아닌, 저 멀리 뉴욕, 파리, 밀라노 등의 최고 전문가들이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작품의 세계로 다가온 결정적 순간이 있다. 그 이후 나의 어딘가는 패션이라는 물감으로 칠해져 아무리 씻어내려 해봐도 그 얼룩이 빠지지 않아 결국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의 그 결정적 순간은 중학교 3학년 때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조금씩 조금씩 스며들기보다 시각적으로 큰 자극을 받고 그때부터 눈을 뜨게 되었다고나 할까. 어머니가 초등학생때 내게 사준 이케다 리요코의 <베르사유의 장미> 만화책이 내 삶에 TV 만화와는 다른 '순정만화'라는 색상을 칠해준 것처럼, 마침 만화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면서 더 이상 수업을 들으며 교과서나 노트에 사람얼굴을 그리는 버릇이 사라질 때즈음, 우연히 집 근처의 중소규모의 문고에서 구입한 해외 라이센스지 <엘르 ELLE>의 97년 여름호 (7월이나 8월이라고 생각되는데)가 내 인생에 아주 진한 터치를 남기게 되었다. 특히 부록으로 주었던 97년 F/W 컬렉션 모음집은 서울에 하는 중학생 여자아이에게 세상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다고 여겨지는 패션 하우스들의 감도높은 룩들을 보여주었고, TV에 나오는 연예인들이 가장 세련된 줄로만 알았던 나는 바깥에 더 큰 세상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부록의 후반에는 한국 디자이너들의 컬렉션도 있었는데 해외의 패션하우스들과 그 수준 차이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가 보아도 느껴질 정도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컬렉션이 돌체 앤 가바나의 컬렉션이었다. 돌체 앤 가바나는 당시 들어본 적도 없었고 실제로 한국에 매장이 생기기 전이었다. 그래서 이 아름다운 옷들을 직접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참 슬펐다. (그 당시에는 그 옷들을 실제로 보았으면 더 슬펐을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눈 앞에 놓인 옷들 중 단 한 벌도 살 수 없다면 얼마나 더 슬펐을까?)
발목까지 오는 긴 기장의 코트와 스커트, 남성복을 재해석한 듯한 넥타이 스타일링,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전체적인 룩의 밸런스를 맞춰주거나 위트를 가미해준 모자와 헤드피스. 크기는 작지만 섬세한 디테일이 돋보이는 가방들. 패션이라는 것이 이토록 환상적일 수 있는 것이라니!
특히 내 눈에 띄었던 것은 뷔스티에와 롱스커트라는 여성스러운룩에 워커를 매치한 스타일링이었다. 지금은 여성스럽고 드레시한 의상에 스니커즈나 워커를 매치하는 스타일링이 흔해졌지만 1997년만에도 흔치 않은 룩이었다.
아무튼 잡지를 보며 저렇게 입어보고 싶었지만 무엇하나 중 3 소년의 옷장에 있을만한 아이템이 없었다.
그렇게 저 컬렉션을 잊어가고 있었는데 내가 일을 시작하고 수입이 생기고 어떤 옷이든 입을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이베이나 해외의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저 시절 의상들을 볼 때마다 이상한 감정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래, 지금이라도 입을 수 있어!
그렇게 하나하나 모으다 보니 우연치 않게 다 모았다
오리지널의 룩에서처럼 워커를 신어볼까 고민해보았지만 요즘 길거리에 나가면 제일 흔하게 보이는 스타일링이기 때문에 오히려 머리를 풀고 꽃자수가 놓여진 돌체 앤 가바나의 미니 백을 매치해 페미닌한 무드로 소화해보았다.
하지만 오리지널룩에서 선보인 저 깃털 헤드피스는
여전히 도전해볼 만한 제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