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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 storyteller Jan 10. 2021

시오타 치하루 <혼이 흔들린다>

2019년 도쿄에서 특히 좋은 전시를 많이 보았다.

그중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롯폰기 힐즈에 위치한 모리 미술관에서 열린 시오타 치하루의 <혼이 흔들린다> 전시이다.  

塩田千春展:魂がふるえる 2019.6.20(木)~ 10.27(日)



우리나라에서는 같은 전시를 부산 시립 미술관에서 <영혼의 떨림>이라는 부제로 선보였는데,

개인적으로는 지나치게 예쁜 워딩을 사용하여 작가의 의도를 포괄하기에 적절치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영혼이라 함은 영어의 소울 SOUL을 떠올리기 쉽지만 일본어로 魂은 혼 또는 넋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서양에는 원혼이라는 것이 없다. 누군가가 죽어서 한을 갖고 이승을 떠돌아 사람들을 해코지한다는 정서는 아시아에 널리 존재한다. 그래서 특히 공포영화를 보면 서양에서 무서운 것은 영혼이 아니라 대개 살아있는 사람이나 외계인이나 좀비 같은 다른 생명체이고, 아시아에서 무서운 것은 '혼'이다. 따라서 이 전시를 보고 있으면 할리우드 영화 <사랑과 영혼>이나 선불교 혹은 요가 구루들의 참선과 같이 다듬어지고 정제된 천국에 가까운 이상향을 경험하게 되기보다 일본 영화 <주온>스러운 괴기함을 담고 있어 누군가의 불안감과 두려움, 공포 같은 것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지옥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서양 지성의 뿌리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영혼의 깨끗함, 천국의 완벽함을 상징하는 크리스털처럼 예쁘고 빛나는 것은 없다. 빨갛고 검은 강렬한 지옥의 색상으로 얽히고설킨 거미줄이 온 사방에 뻗혀 당신조차 집어삼킬 것 같다.


사진 이미지의 인물은 접니다. 재사용 금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있고 그 거미줄의 공간에서 벗어날 수 있다. 거미줄은 온 사방을 뒤덮고 있지만 당신은 그 사이를 돌아다니고 지나칠 수 있다. 우리를 옥죄는 수많은 불길한 어떤 것들은 분명 우리들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 아닌 '혼'이기 때문에, 당신이 벗어나고자 하면 사실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사로잡히고자 하면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이 둘러싼 거대한 혼의 환영에서 벗어나라.

이 곳에 있는 우리 모두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도 모를 이 거미줄에 혼이 사로잡힐 수 있지만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두려운지, 얼마나 깊은지, 얼마나 집요한지 알고 있지만

그래서 당신의 혼이 떨릴 정도로 무섭다는 것을 알지만



혼의 환영을 그냥 저 세상에 두고 당신은 이제 이 곳에서 걸어 나가

삶을 살아라.


그럼 이것은 그냥 환영일 뿐일 것이다.


혼이 떨리는 것으로

삶을 뒤흔들지는 말아라.


그래서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영혼이 아니라 '혼'으로 번역했어야 했다고

그래야 전시장에서 맞닥뜨리는 기괴함을 이해할 수 있다고

아시아의 정서를 흐지부지해서 글로벌 스탠더드 하게 좀 만들지 말자고

그런 이야기가 하고 싶어 졌다.


우리는 영혼과 혼을 분명 다른 게 받아들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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