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품 알레르기]
등 통증으로 병원을 찾았다. 의사 앞에 앉아 증상을 설명했다. 그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듣더니, 약을 처방해주겠다고 했다. 별다른 검사 없이 약을 권하는 데 약간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통증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뭐든 좋았다. 처방 전에 의사는 한 가지를 물었다. "알레르기 있으세요?" 나는 습관적으로 대답했다. "이부프로펜에 이상 반응이 있어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진료를 마치고 약국에서 약을 받아들었다. 그런데 약 봉투에 적힌 이름을 보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디클로페낙.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잊고 있던, 아니 애써 잊으려 했던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큰아이가 병원에 입원했던 그날이 생각났다. 그때도 큰 병은 아니었다. 감기로 시작된 열이 며칠을 이어지자 안심할 수 없던 우리는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의사는 탈수를 걱정하며 주사를 권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동의했다. 그날 따라 간호사의 손길이 서툴렀던 건지, 아니면 내가 너무 초조했던 건지, 주사를 맞는 아이를 바라보는 일이 유난히 힘들었다.
주사가 들어간 지 몇 분이 지났을까. 아이가 갑자기 몸을 움츠리더니 숨을 거칠게 몰아쉬기 시작했다.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고, 곧이어 파란 기운이 스며들었다. 청색증. 나는 처음 들어보는 단어를 아이의 얼굴에서 배우게 되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서둘러 응급 처치를 했지만, 내 머릿속에는 온갖 최악의 상황이 스쳐 지나갔다. 아이가 기절한 채로 작게 떨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다.
그날 이후 우리는 아이가 디클로페낙이라는 성분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도"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 건, 그 일이 영구적인 상처나 후유증 없이 지나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에게 남은 트라우마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았다. 아이의 숨소리를 듣기 위해 밤마다 베개 옆에 귀를 대던 날들의 기억, 그 작은 손을 붙잡고 마음속으로 수백 번 다짐했던 약속들. "다신 이런 일 없게 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그 약속을 망각했던 과거의 나와 마주하고 있었다.
약 봉투를 든 손이 떨렸다. 나는 약사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약에 디클로페낙 성분이 들어 있나요?” 약사는 봉투를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이거 통증 완화에 효과 좋은 약인데요.”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온갖 신호가 울리며 과거의 불안을 소환했다.
“죄송하지만, 이 약은 못 먹을 것 같아요. 다른 걸로 바꿀 수 있을까요?” 약사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약사도, 의사도 이 약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 리 없었다. 나는 잠시 스스로를 책망했다. 왜 진료실에서 디클로페낙의 기억을 떠올리지 못했을까. 이 약을 처음 본 것도 아닌데, 왜 내 머릿속에서 지워졌을까. 아마도 시간이 흐르며 경계심이 무뎌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 내 안의 불안은 확실히 다시 살아났다.
집으로 돌아와 거실 소파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바뀐 약봉투가 손에 쥐여 있었지만, 여전히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아이가 힘들었던 그날의 기억이 또렷이 떠오르며 그날의 나와 오늘의 내가 겹쳐 보였다.
그날 나는 두려움 속에서도 어쩔 수 없이 믿어야만 했다. 아이를 도와줄 사람은 의사와 간호사뿐이라고. 그리고 오늘도 나는 의사의 판단에 의지하며 약을 받아 들었지만, 순간의 망각이 불러온 파장은 생각보다 컸다. 트라우마는 그렇게 시간이 지나도 어딘가 깊이 숨어 있다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를 휘감고 만다.
이번 일을 겪으며 깨달았다. 과거의 상처는 피할 수 없는 사실로 내 삶의 한 부분이 되었다는 것. 나는 어쩌면 그 기억을 끝없이 되새기며 삶의 어느 길목에서 또다시 경고의 벽에 부딪힐 것이다. 하지만 그 기억은 또한 나를 더 신중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내가 지키고 싶은 것들을 더 단단히 보호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약봉투를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햇빛이 유난히 밝게 내리쬐는 오후였다.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는 건 두렵지만, 그것을 마주하며 배운 교훈 덕분에 나는 내일을 더 안전하게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