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채식주의자-[채식주의자]를 읽다가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부엌에서 풍겨 나오는 부추향과 함께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들, 이리 와서 먹어봐. 좋은 고기야."
식탁 위에는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탕이 놓여 있었다. 푸른 부추가 가득 뜬 국물 사이로 살코기가 보였다. 몸에 좋다고 한 보신탕이었지만, 나는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우리 마당을 뛰놀던 아이의 살점일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숟가락을 들자마자 이상함을 느꼈다. 뭔가 먹어선 안 될 것을 먹는다는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어, 화장실에 간다며 입안의 고기를 몰래 손수건에 싸서 담벼락 뒤에서 뱉어냈다. 그저 음식을 먹는 일이었지만 마음 한켠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다른 가족들의 대화가 멀리서 들려왔다. “보신탕 참 맛있다.” “푹 고아내니 정말 좋아.” 나는 문득 그 아이는 어떻게 죽었을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생각해 보았다. 전기에 감전되어 죽어간 건 아니었을까? 우리는 정말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여름이면 아버지의 회사 동료들이 야유회에서 개를 잡아먹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들의 웃음소리 뒤에 숨겨진 생명의 비명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인간의 즐거움이 다른 생명의 죽음을 필요로 하는 걸까?
할머니 댁에 갔던 시골의 기억도 있다. 이른 아침, 돼지의 울음소리에 잠이 깼다. 그 비명은 단순히 음식이 아닌, 또 다른 폭력의 경험으로 다가왔다. 이후로 돼지고기 특유의 비린내가 나에게는 그저 냄새가 아닌, 고통의 흔적으로 여겨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도 변했다. 회식 자리에서 살아있는 낙지를 먹고, 방금까지 살아있던 신선한 생선회도 먹었다. 사람들 속에서 이상한 사람으로 비치지 않기 위해서였을까? 편해지고 싶어서였을까? 어느새 나는 ‘보통’이 되기 위해 서서히 그것들을 받아들였고, 억지로라도 삼켰다.
얼마 전 동네 가게의 개업식에서 본 돼지 머리 또한 그러했다. 눈도 가리지 않은 채 전시된 모습은 마치 살아있는 돼지를 마주하는 것 같았다. 축하의 의미로 죽은 생명을 전시하는 일이 과연 옳은 걸까?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를 읽으며, 오랜 기억이 떠올랐다. 주인공 영혜가 꿈속에서 본 피비린내처럼, 나의 어린 시절 돼지고기에서 느낀 비린내가 다시 코끝을 스쳤다. 지금의 나는 사회의 관습 속에서 육식을 하는 ‘보통 사람’이 되어버렸지만, 여전히 의문이 든다. 인간은 정말 이토록 많은 생명을 해할 자유가 있는 걸까?
우리는 육식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다. 도살장은 도시 외곽으로 밀려나고, 정육점의 고기는 비닐에 깔끔히 포장되어 있지만, 그 포장 속에 담긴 생명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물론 생존을 위해 일정한 폭력은 불가피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공장식 축산과 대량 도살이 생존을 위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채식주의자들의 선택은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양심을 일깨우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묻는다. 우리가 가진 ‘해할 자유’는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을까?
모든 음식은 누군가의 생명이다. 채소와 과일도 생명이다. 하지만 우리는 적어도 불필요한 폭력과 고통을 줄일 선택이 가능하다. 그것이 바로 자유가 우리에게 준 책임이 아닐까?
[어린 시절 기억과 chat gpt & Claude 3.5 sonnet의 도움을 받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