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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elsilvere Nov 29. 2017

경험의 변주,Variation of Experience

존 듀이의 Art as Experience 에 대한 짧은 단상 




경험의 변주 

Variation of an experience


만일 모든 의미가 단어에 의해서 적절하게 표현될  있다면 

회화나 음악 같은 예술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한 사람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을까? 간접경험이든 직접 겪는 경험이든 우리는 많은 경험을 한다. 그리고 그 경험에 대한 기억을 신체 어딘가에 저장한 뒤 되뇌고 곱씹고 혹은 망각하며 삶을 이어간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책을 통해 숱한 인생들을 간접적으로 경험했으며 -불필요한 것들은 배설물처럼 몸에서 빠져나갔지만- 대부분의 것들은 내게 남아 상상하고 몽상하는 즐거움의 자양분이 되었다. 사실, 많은 계획을 갖고 살아가지만 대부분의 것들은 우연히 선택한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한 우연은 운명적 경험을 통해 나의 삶이 되고 곧, 나 자신이 된다.  


하나의 테마 Theme를 갖고 작곡의 여러 가지 기술로 발전시키고 확장시키는 것을  “변주곡 Variation”이라고 부른다. 음표를 분할하거나 늘리고 다양한 꾸밈음을 넣거나 리듬을 연장, 축소하는 방법 등으로 만들어진 변주곡은  자유롭지만 확실한 규칙이 있고 풍성하지만 압축시킬 수 있는 단 하나의 멜로디가 존재한다. 작곡가들은 곡을 쓸 때 무수한 아이디어 속에 홀로 서있다. 그들은 귀에 들리는 환청과도 같은 멜로디를 직접 악보에 옮겨 놓음으로 생각으로만 존재하던 아이디어를 현실의 그림으로 그려낸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의 악보를 보고 연주해야  비로소 선율과 화성이 존재하는 음악이 된다. 


예술 작품이 진정한 의미에서 예술작품이 되는 것은 개인의  속에서 독특한 경험을 불러일으킬 때이다작곡가나 연주가에게 오선지 위에 그려져 있는 음표들은 개개의 연주자들에게 자신만의 독특한 연주를 불러일으키는 수단이 되며이런 수단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그것들은 예술작품이 된다.

” 


듀이가 언급한 진정한 의미로의 예술은 아마도 이것일 것이다. 가변성을 지닌 곡을 작곡가의 의도 안에서 -모든 악보는 정확한 규칙을 갖고 있다. 빠르게 혹은 느리게 등의 그들만의 언어가 존재한다-  연주자가 연주할 때, 그리고 그 연주로 인해 관객의 경험이 연주자, 작곡가 모두와 일치할 때 그것은 하나의 경험이 될 것이다. 공적인 경험, 예술가의 적확한 의도가 청자와 함께 경험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의 주장과 일치한다. 또한, 의도에 대한 듀이의 주장은 이와 같다. 


의도는 가장 유기체적 방식으로 개인적 자아와 관련된다자아가 소재를 통제하는 것은 단지 ‘마음 대한 통제가 아니라 내부에 통합된 마음을 가진 인격체에 의한 것이다의도 Purpose란 행위 속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동일시이다이런 점에서   예술 작품에 고정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예술가에게 그의 작품이 정확히 무엇을 표현하는지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적절치 못한 일이다 작품을 통해서 표현하려는 나의 생각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중요한 것은 나의 작품을 보는 사람이 진솔한 삶의 경험다시 말하면 생생한 삶의 경험 속에서  작품에서 이끌어 내는 

바로 그것이다.

 “



멜로디뿐 아니라 화성에도 정확한 규칙이 있다. 현대 음악은 그러한 규칙을 벗어남으로 존재하게 되었지만 -마치, 현대 작가의 그림처럼- 모차르트에서 바그너까지 그들의 곡은 온전한 화성을 지키고자 노력한다. 청자가 불쾌를 감각하게 되는 화성 진행은 배제했고 온전한 맺음이 이루어지지 않는 음악은 음악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찬송가 역시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수학적 계산에 의한 화성 진행을 지키고자 노력했으며 그 노력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우리가 듣는 가요도 약속처럼 굳어진 코드 진행이 존재한다. 1도-4도-5도-1도의 화성이 정확히 진행되지 않으면  청자는 불안함을 느끼고 이상한 음악이라고 생각하게 되기에 불협화음은 빠른 리듬으로 보류 없이 지나가게 작곡한다. 근래의 많은 현대음악은 실험성 짙은 예술을 추구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감각하는 것은 -또, 어쩌면 듀이가 추구하는 음악은- 정확한 규칙이 존재하고 명확한 진행이 전제되는 것이다. 드라마틱한 협화음을 느끼기 위해선 저항과 같은 불협화음이 반드시 필요하다. 선호하지 않는 음을 듣는 순간 저 음의 끝은 무엇일까?라는 의문과 함께 해소되는 기분이 드는 협화음의 등장으로 인해 우리는 곡의 마지막을 직감하게 된다. 정확한 쉼 Pause를 지키는 것과 해소를 위한 긴장의 요소를 곡의 곳곳에 배치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불협화음의 교과서 같은 쇼팽 에튀드 Op.25 No.5 마우리치오 폴리니 연주를 잠시 감상해 보자. 


혼란에서 조화로 이행하는 순간이야말로 가장 강렬하게 살아 있는 순간이다.

” 


쇼팽 에튀드와 같이 완벽히 계산된 화성의 배열과 훌륭하게 맞아떨어지는 멜로디의 조화로움은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만 사실, 곳곳에 배치된 불협화음으로 인해 우리는 조금 더 세밀한 감상자의 입장에서 긴장과 완화를 경험하게 된다. 실상 우리가 파격을 경험하는 순간은 예상하지 못한 순간 쏟아져 나오는 음표들의 리드미컬한 진행이다. 우리를 흥분의 상태로 몰아넣는 음악이나 영화들은 대부분 “반전”이 가미되어 있다.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졌을 때의 파장이 더욱 아름다운 것처럼 완벽히 계산된 것만으로는 하나의 경험, 하나의 예술은 존재할 수 없다. 계산된 것은 있지만 곳곳에 숨어있는 우연의 요소가 더해져야 비로소 하나의 경험을 경험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낭만적인 것은 적절한 리듬에 의해 질서 잡힐  고전적인 것이 된다. 리듬은 성질들 사이의 합리성이다. 각각의 진행 단계가 동시에 앞에 있었던 것의 요약 이자 완성이고모든 완성은 예측을 긴장상태로 앞으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에리듬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음악에서 정지는  공간이 아니라그것이 규정하고 있는  지점에서 저지하고 있는 대신에리드미컬한 침묵이며 그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에 구두점을 찍고 동시에 충동을 앞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간주해보자. 만약, 나의 삶이 하나의 경험을 지닌 예술이라면 An Experiences는 문자 그대로의 “하나"의 경험이 아닌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변수를 지니고 있는 그리고 그 속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들을 선택했기에 도달할 수 있었던 지점일 것이다. 기존의 익숙한 협화음에 우연성 짙은 불협화음, 리듬을 덧입힐때 비로소 하나의 곡이 완성되는 것처럼 예술 혹은 삶을 만들어 내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는 시를 쓰는 시인이 아니라 시 그 자체가 되고 싶다. 그렇게 될 때에야 비로소 나는 하나의 경험을 한 것일 테니 말이다.  


예술 작품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잠시 그것들을 잊고 눈을 돌려 우리가 보통 미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 경험의 일상적인 힘과 조건들을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경험을 위한 경험을 하는 경우가 있다. 사랑이 아닌 연애를 위한 연애를 하고 진심으로 원하는 곳이 아닌 남들이 가는 곳을 여행하고 할 때가 되어 결혼을 하는 것 같은 경험. 물론, 그 경험으로 인해 성장하거나 달라지는 경우도 있겠지만 타의에 의한 경험은 대부분 생명력 없는 공허한 기억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내 안에 속해있는 결핍이라는 요소와 갈망하는 주체가 하나가 되어 무언가를 향할 때 비로소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경험은 영원하지 않다. 아니, 영원할 수 없다. 다만 우린 하나의 경험으로 인해 새로운 세상에 대한 시야를 넓힌 뒤 그 확장된 시야로 같은 세계를 다시 보며 속에 숨어 있는 의미들을 찾아내는 경험을 하게 될 뿐이다. 그 안에서 만족과 충만한 행복을 느끼며 표현하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을 예술처럼 살아내는 것 아닐까?


쾌는 우연한 접촉과 자극을 통해서도 생겨날  있다행복과 기쁨은 우리 존재의 심층에까지 이르는 충만함에서 온다 충만함이란 우리의 존재 전체가 생존 조건들에 적응하는 것을 말한다

“ 

이미 정해져 있는 삶 속에서 긴장과 완화, 협화와 불협화의 조화로움을  완벽하게 경험한다면 그것이 바로 리듬이 있는 삶일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우연히 다른 형태의 삶이 더해지고 그것을 충분히 감각한 뒤 나로부터 세상으로 쏟아내는 것. 와르르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씹어 삼킨 뒤 온전한 영양분으로 내 몸 곳곳에 퍼지는 힘을 지니는 것. 그것이 듀이가 말하는 단, 하나의 경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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