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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승범 Oct 30. 2015

비발디 사계, 그리고?

막스 리히터의 해체, 그리고 재조립



망치로 한 대 맞은 느낌이다


2012년 작곡가 막스 리히터(Max Richter)는 클래식 애호가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음반을 내놓는다.


클래식 시장에서 가장 굳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레이블인 '도이치 그리모폰' 을 통해 발표한 그의 앨범은 다소 도전적이다.


2012년 DG에서 발매한 막스 리히터의 비발디 사계


Recomposed by Max Richter


현대 음악 작곡가인 그가 비발디 사계를 아예 '새로 작곡' 했다는 것이다.

보통 고전을 건드릴 때 현대적 재해석이란 말을 많이들 쓰곤 하는데 이건 맹랑(?)하게도 아예 다시 썼다는 것이다.


의아한 표정으로 CD를 넣고 첫 트랙을 듣는 순간 두 눈은 커지고 미간이 좁아들기 시작한다.


전자 음악을 연상시키는 질감에 따로 노는듯한 악기들의 진행, 그렇지만 불협이 아니다. 조화를 이루면서도 흥미를 불러 일으킨다.


곡의 75%는 제가 새로 썼어요. 그렇지만 비발디의 DNA가 작품에 살아 숨쉬도록 했답니다. 이러한 점들이 잘 자리잡을 수 있도록 작곡하는 것이 숙제였어요.
-막스 리히터, Classic Fm 인터뷰 중에서


사실 막스 리히터는 현대 음악 작곡가보다 TV 다큐멘터리, 영화 음악을 작곡하는 것으로 더 알려져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다룬 BBC 다큐멘터리의 우울하고 서늘한 배경 음악을 작곡한 막스 리히터는 작품의 완성도를 한 층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레바논 전쟁의 참상을 다룬 애니매이션 바시르와 왈츠(Waltz with Bashir)의 음악을 담당하였는데 이 작품을 통해 그는 많은 수상과 동시에 일약 유명 작곡가가 된다.


바시르와 왈츠(Waltz with Bashir), 2008


일부러 현대적 인상을
주려고 하진 않았어요,
비발디의 언어를 유지했습니다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후 영국 왕립 음악원에서 작곡을 전공한 그는 엄밀히 정통 클래식 작곡가의 범주 안에 있다.


전자 음악, 펑키, 영화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도 관심을 갖던 그였지만, 도이치 그라모폰과 함께 그는 클래식 음반을 들고 돌아 왔다. 그 만의 언어로 고전 작곡과와 소통하면서 말이다.


비발디 사계를 어렸을 때 부터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쇼핑 센터에서도, 광고에서도, 휴대폰 연결음에서도 사계가 들리더군요. 그러다보니 정말 짜증이 났습니다.전 새로운 방법으로 다시 사계와 사랑에 빠지고 싶었습니다.
-막스 리히터, Sinfini 인터뷰 중에서


기존 곡의 75%를 버리고 새로 작곡했다지만 정작 음악을 들어보면 전혀 이질감이 들지 않는다. 매우 신선하면서도 비발디 고유의 감정은 물론 다이나믹, 음악적 질감이 살아 숨쉰다.


전 일부러 작품에 어떤 현대적 인상을 주려고 하지 않았어요. 대신 감정을 남겨두면서, 비발디가 가진 고유의 음악적 언어를 지키고자 했답니다.
-막스 리히터, Classic Fm 인터뷰 중에서


막스 리히터와 다니엘 호프, © Erik Weiss / DG


출퇴근길을 돌아서
가는 것과 비슷해요


그는 악보를 다 뜯어서 해체하였음이 분명하다. 흔히 생각하는 리메이크의 개념이 아니다. 그렇다고 오마쥬의 형식도 아니며, 편곡도 아니다.


정말로 그는 재작곡(recomposed), 재창작(rewrote)한 것이다.


본질(essence)만 남겨두고 버릴 것은 버리고 새로 만들 것은 창작해낸 후 배열하기까지, 결코 쉽지는 않은 작업이었을테다.


어쩔 땐 기존 악보를 그대로 남겨두고, 다를 땐 악보를 뒤집기도 했죠.
물론 새롭게 만들기도 했구요.
글쎄요, 이 작업의 방법은 출퇴근 길을 돌아서 가는 것과 비슷한 것 같아요.
왜 매일 지나지만 정말로 보지는 못하는 장소들이요. 돌아돌아 가면 그 곳들에 마치 처음 온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 같을걸요.
-막스 리히터, Sinfini 인터뷰 중에서



기존 작품에 손을 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대중에게 익숙하고 유명한 것들은 '독이 든 성배' 와 같다. 대중의 관심은 끌 수 있을지 모르더라도 대부분 만족시키지 못한 결과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그만큼 기존 작품에 대한 아우라가 강력하다는 반증일테지.

게다가 클래식과 같이 수백년을 이어온 곡 은 더욱 어려울 것이 뻔한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클래식 음악을 샘플링한 경우는 있어도 아예 새롭게 재해석 한 경우도 극히 드물다.


물론 존 루이스가 재즈의 풍미를 더한 바흐의 평균율같은 작품은 정말 훌륭하다.

다만, 이 작품 같은 경우엔 평균율 악보는 그대로 두고 사이 사이에 재즈의 즉흥성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막스 리히터의 사계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재즈 피아니스트 존 루이스의 바흐 평균율 1권


폭풍, 열정을 그대로 담고 있어요
새로운 에너지, 선율로 말이죠


앨범 수록 곡 중 여름 3을 들어보자.


첫 주제는 기존 곡과 유사 하지만, 곡의 대부분을 끌고가는 주제(1:57-)는 전혀 새로운 곡이다.

그럼에도 원곡에서 가진 긴장감은 그대로 녹아있다. 아니 오히려 더 배가 된다.


그리고 이어 등장하는 바이올린 솔로(2:50-)는 곡의 처절함과 처연함을 불러 일으키며 가슴을 뛰게 만든다.


마지막의 고요(3:38-)는 지금 껏 손에 땀을 쥐게 한 것도 모자랐는지 덜덜덜 떨게 만들어 버린다.


여름3을 가장 좋아해요. 원곡에서 가진 폭풍우와 열정을 새로운 에너지와 선율로 다 담고 있지요. 비발디의 속도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 곡을 마치면 그제서야 사람들의 긴 한 숨을 내쉰답니다.
-다니엘 호프, Sinfini 인터뷰 중에서


다니엘 호프, 음반의 솔리스트(vn)로 참여했다 / © DG


현대 음악의
새로운 접근 방법?


여름3뿐 아니라 모든 곡들이 다 비슷하다. 솔로 라인을 찾아서 듣고, 오르락 내리락 하는 현의 선율을 찾아서 듣다 보면 각기 다른 매력의 오묘한 조화를 엿볼 수 있다.


대중의 시선과 접점을 찾기 힘든 현대 음악의 현 주소, 막스 리히터와 같은 접근이 그 길의 절대적 해결법은 아닐지라도 풀어나가는 하나의 길은 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절대적 현대 음악론자에겐 이와 같은 방식을 현대 음악의 범주안에 넣진 않겠지만 말이다)



막스 리히터,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기대된다



Classic Fm 지 기자가 다음과 같이 물었다.

막스 리히터씨, 이 앨범의 열렬한 팬이 있다면 그게 누구였으면 좋겠나요?




안토니오 비발디





*앨범 정보(2012년 발매)

- 레이블 : Deutsche Grammophon

- 바이올린(솔로) : Daniel Hope

- 지휘 : André de Ridder
- 오케스트라 :

Konzerthaus Kammerorchester Ber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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