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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ichard B Nov 14. 2024

먹먹함과 막막함의 기로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가 많다. 인생에도 나침반이 있었다면 좋을 텐데

신을 믿지는 않지만 구태여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도 않는다.

유일신이 되었던 다신의 종교사상이 되었던 세상을 있게 하고 이 모든 것을 창조한 존재가 있다면 왜 내가 그가 설정한 자연에서 그 섭리와 더불어 조화로이 살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는지 의문을 가질 뿐이다.


그러한 수많은 의문들 속에서 갖는 막막함과 먹먹함 사이에서 나는 항상 갈등과 방황을하며 '흩날리지 않기, 나부끼지 않기, 흩어지지 않기'를 기도처럼 그리고 주문처럼 외며 어떻게 던 살아보려고 아니, 살아 내려고 숱하게 발버둥을 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가 많다. 나의 인생에도 나침반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인생을 사는 것에 있어 어떠한 흐름 속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고 있는 요즘이다.

상투적인 모습이겠지만 어느 나이에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어느 시점이 되면 어느 정도의 모아놓은 돈과 어느 정도 기반을 마련하는 삼십 대의 삶을 이룩하는 것이 이리도 어려운 것이었을까.


물론,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삼십 대의 사람들이 여전히 본인이 하고 싶은 일, 적성에 맞는 일 그리고 해야만 하는 일을 찾으며 제자리 찾기를 위해 고군분투를 하느라 애를 먹는 것은 누구라도 아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그들의 평균선상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을 늘 떨쳐버릴 수가 없다.


원하는 직업을 가지고 나면 모든 게 잘 풀리겠거니 하는 요행을 바라지도 않았고 일확천금 복권에 당첨되어 벼락부자가 되는 꿈은 더더욱이 꾸어본 적도 없고 그저 하루와 일상에 충실할 뿐인데 어째서인지 내가 갇힌 뫼비우스의 띠 같은 굴레에서 좀처럼 벗어 나오기가 힘이 든다.


이를테면 기껏 돈을 모았다 싶으면 어김없이 어떠한 사건사고가 터져 그 알량한 목돈을 전부 날려야 하는 사건이 발생한다던가 보증금 사기사건에 휘말려 반전세로 들어간 집의 보증금 반환 분쟁을 1여 년간 겪고 있었는데 그 집주인이 갑자기 죽어버렸다고 그 딸이 연락이 온다던가 하는 정말 버라이어티 한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는다.


항상 통장의 잔고는 0에 수렴하고, 메꿀 시도 조차 할 수 없게 돈이 조금 모였다 싶으면 이런저런 사건사고들이 터져 정신을 아득하게 만든다. 정말 굿이라도 해야 하나 싶을 만큼 인생사가 풀리지 않아 점 집에도 쫓아다녀봤으나 굿도 돈이 있어야 하는 것.


신줏단지가 아닌 애물단지 같은 처량맞고 청승맞은 인생을 끌어안고 아득바득 살아내 보려고 이를 꽉 깨무는 오늘이다.




최근 몇 년 동안 밥 다운 밥을 먹어본 기억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생활비를 아끼겠다고 묶음으로 세일해서 파는 인스턴트 라면에 고작 영양보충을 하겠다고 계란을 한 두 개 풀어서 후루룩 먹고 한 끼 해결했다고 넘긴 지 한 3년은 되어가는 것 같은데 그래도 비행이라는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기내식으로 나오는 '크루밀'을 그나마 밥 다운 밥이라고 먹었고, 홍콩의 '대감집'에 이직을 해와서는 트레이닝 기간 동안 호텔과 며칠간의 호텔 식사가 제공되어서 그 때나 좀 양껏 챙겨 먹었지 이런 특수한 상황들을 제외하고 나서는 우리가 일컫는 제대로 된 끼니는 채워본 일이 내 기억에는 없다.


이렇게 어떤 청승맞은 일상에도 너무나 익숙해져 한 끼에 5천 원이 넘어간다 싶으면 사치라 간주하면서 먹으면 똥이나 되어버릴 것 차라리 스트레스 해소에나 더 보태자 동 전 몇 닢씩 모아 담배를 사서 피운다.


직업과 나를 품고 있는 회사라는 타이틀을 빼면 저쪽 달동네에서 몇 년 동안 가난하게 고시공부를 하는 고시생과는 별 다른 점이 없는 것 같다. 


씀씀이가 헤픈 것도 아닌데 왜 이런 굴레에 빠져 평균이하의 삶을 사는 것일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예고도 없이 죽어버리고 싶은 생각이 지금은 없으니 일단 또 살아보기로 한다. 



어느 날에는 지독한 향수병에 걸린 적이 있었다.

고향이라던가 가족들이 주는 아련한 그리움과 추억이라는 것이 내 인생에는 언제나처럼 부재중이기 때문에 그런데에 대한 향수는 없는데 차라리 이렇게 힘들 거면 내 나라에서 힘든 게 낫지 않나 라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홍콩의 회사로 옮겨오기 전 이직면접을 위해 잠시 한국에 잠시 다녀온 적이 있었다.


4월 중순 즈음이었으니 약간의 따스함과 쌀쌀함이 도처에서 나를 휘감았고 그러한 바람에 벚꽃 잎이 흐드러지게 휘날렸고 달달한 봄 꽃 내음들이 나풀거리는 날이었다. 면접장 근처에 저렴한 숙소를 구해놓고 내가 항상 사랑하는 저가 커피 전문점의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손에 들고 서울의 한 귀퉁이를 걸어 다니다 멍해졌던 곳이 있었다. 다름 아닌 '빌라촌' 흔히 말하는 원룸촌이다.


깔끔한 신축 빌라들과 오래되고 낡은 붉은 벽돌의 구옥이 뒤섞여 있는 그곳의 모습이 퍽 와닿았다.

빌라촌의 귀퉁이에 있는 편의점, 건물과 건물 사이에 마치 내 인생처럼 정신없게 얽혀 이어진 전깃줄, 무표정하게 한 푼 벌러 가기 위한 종종걸음을 재촉하는 젊은이들, 파리 날리는 낡고 오래된 백반집.


도무지 알 수 없으나 내가 돌아와야 하는 곳인가 라는 의문을 강하게 주었던 장면이었다.


먹먹했다. 

그저 먹먹했다. 내게 주어진 현실을 제대로 즐기지도 못할 만큼 숨 막히게 하는 내 인생이라던가 숨 좀 쉴만하면 목 조르듯 일어나는 불쾌한 일들, 필 만하면 어그러지는 내 일상과 인생. 왜 나는 나를 이런 허름한 원룸촌에 가두려고만 하는 것일까.


막막했다.

그저 막막했다. 외국살이 하러 간다면 용돈 턱턱 쥐고 따뜻한 말 한마디와 사랑이 담긴 포옹을 해주는 부모와 가족이 있는 친구들이. 그저 무던하게 일하고 작은 돈이라도 착착 모아 휴가도 다녀오고 맛있는 밥 망설임 없이 사 먹을 수 있는 평범한 삶을 사는 친구들이. 그렇게 착실하게 일하고 모아 자신의 삶의 환경을 조금씩 더 낫게 만들어가는 그들이 부러웠다.


항상 그 중간에서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어느새 두 발짝, 세 발짝 뒷걸음질 쳐야 했던 그 순간들의 연속을 인생의 굽이마다 가져야 했던 내 인생이 정말이지 싫증이 났다.


그렇게 마냥 따뜻하지도 않은 4월의 끝을 향해가던 날, 이름 모를 동네의 원룸촌 어귀에서 넋을 놓고 앉아 한참 내 인생에 대해 생각을 했더랬다. 과연 나의 세상은 나에게 무엇을 뜻하는가를 고민하면서.



그런 고민을 하면서 오기가 생겼는지 독이 바짝 올랐는지 아무튼 다음 날에 치러진 이직 면접에서 당일 최종합격이라는 결과를 쥐어받았다. 뛸뜻이 기뻤지만 그 뜀박질도 주저하게 만드는 것이 나의 인생. 그러면서 또 고민을 해야 했다. 결국엔 돈으로 귀결되는 인생사, 돈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 세렝게티 초원의 들짐승이라던가 중산층 집에서 금지옥엽으로 기르는 개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았던 날이었다.


잠시잠깐의 뛸 듯이 기쁜 마음을 나누고자 그래도 가족이란 존재들에게 전했는데 그냥 시큰둥하다.

언제나처럼. 


그렇게 면접을 끝내고 집에 도착해서도, 홍콩으로 넘어오기 전 잠시 머물렀던 며칠간의 기간에도 언제 출국하느냐, 필요한 짐은 다 챙겼느냐 하는 진심이 담긴 질문을 받은 기억은 없다. 나 가살 고있는 막내는 메시지를 넣어놓은지 1주일이 지나도 답이 없고, 아들 둘을 데리고 잠시 친정을 방문한 여동생과는 형식적인 말이 오고 갈 뿐.


언제나처럼 식모같이 조카들의 젖병을 삶거나 옷을 빠는 일, 밥을 차려주고 하는 일을 기계적으로 하는 나는 이 기간 동안 어머니라는 타이틀을 쥐고 있는 사람이 차려준 밥을 먹은 기억이 없다.


있을 뻔은 했다. 다만 공산당 수령동지 같은 아버지란 사람과 겸상을 하기 싫었고 그날에도 그는 퇴근해서 집에 와서는 신경질이 가득 담긴 말로 본인의 부인, 그러니 나의 엄마라는 사람과 옥신각신 하는 소릴 하는 탓에 밥맛이 뚝 떨어져 집을 나와버렸기 때문에 아무튼 차려준 갓 지은 밥을 먹을 기회를 날려버렸다.


손주들을 위해 쉴 새 없이 카드를 긁으며 물건을 사들이는 취미를 가진 어머니라는 사람, 나 잘났네 하는 맛에 30년의 공직생활을 이어오고 있는 아버지라는 사람, 여전히 내가 어느 회사에 들어가는지 언제 출국을 하는지 도통 관심도 질문도 없다. 


돈을 좀 빌려달라고 내놓고 직설적으로 말은 못 했으나 형편이 이렇다 잠시 의견을 내비쳤는데 역시나 무반응, 무관심이다. 


그렇게 무관심 속에서 나 홀로 짐을 바리바리 챙겨 현금 25만 원을 가지고 홍콩으로 왔다.

다행히 회사에서 교육을 받는 10주 동안은 호텔을 제공해 주고 첫 열 힐은 호텔에서 하루 세끼 식사를 제공해 주기 때문에 많은 돈은 들지 않았지만 한국에서 옆 동네에 온 것도 아닌 물 건너 남의 나라에 왔는데 수중에 25만 원만 들고 정말 모험을 떠나왔다.


떠나온 지 3주가 다 되어가는 시점까지 가족의 그 누구에게서 일절 연락 한 통이 없다.

혹시 나가 역시나 가 되는 것 조차에도 너무나 익숙해져 그러려니 한다.


이러한 무관심과 언제나처럼 내팽개쳐 저버린 삶이 주는 먹먹함,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는 늪에 빠진 것과 같은 삶 그리고 어떤 게 옳은지 맞는지도 모를 만큼 어지럽고 휘청이는 막막함의 기로에서 여전히 방황을 하고 있다.


이윽고 결단을 하나 내린다.

그간 가족이라고 여겨온 피붙이들과 연을 끊고 살 것을 결심한다.


아닐걸 알면서 내심 기대하고 상처받는 것, 멍에처럼 씌워진 그림자지고 차가운 유년시절의 아픈 기억들과 상처, 이들로 말미암아 자꾸만 움츠러들고 스스로를 초라한 프레임에 가두는 것. 

오늘로 그만두기로 한다.


한국에는 추석이 시작되었다.

두 해 째 외국에서 명절을 보내고 있다. 그전에 한국에 살았을 때에도 먹고사는 것이 바빠 명절에 고향에 찾아가지 못한 것이 세 해쯤 된다. 그러니 최근 약 5년 동안 고향 본가에서 가족이란 존재들과 명절을 함께 보낸 적이 없다는 이야기인데 그 5년의 시간 동안 가족 그 누군가로부터 명절에 집에 못 오는데 송편이라도 사다 먹었는지, 떡국이라도 챙겨 먹었는지에 대한 연락 한 통을 받은 적이 없다.


더 거슬러 올라가 호주에 살던 몇 년 전, 쌍둥이 동생이라는 존재의 결혼식이 열리는데 그것에 참석하려는 연락을 했을 때 결혼식 당사자인 여동생과 부모는 '뭐 하러 오냐'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가정의 대소사, 명절에도 어떠한 형식적 인사, 환영 따위를 받지 못하는 먹먹함은 또 다른 오기로 작동해 이들을 그냥 보지 않고 살기로, 그렇게 나의 심지를 굳히게 만들었다.


역시나 인생은 철저히 혼자이며 처절하게 고독한 것임을 깨닫는 오늘이다.


그러나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풍요로우며 행복한 한가위를 보내길 바라기도하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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