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의 여름밤
'남매의 여름밤'은 유년시절을 정방향으로 곧게 따르며 노스탤지어를 쌓는 영화이기도 하고, 시절의 향수를 더듬는 역방향의 영화이기도 합니다. 여름밤을 따라가면 그 시절을 걷는 아이들이 보이고, 한풀 꺾인 늦여름에 숨을 돌리면 어른들의 옛이야기가 시작되지요. 그러니 내 마음을 어디에 두냐에 따라 그 시절과 이 계절의 여운이 달리 남을 것입니다. 어느 쪽이 됐든 노스탤지어의 뒷맛은 늘 씁쓸합니다. 건져 올린 아련한 추억은 더는 현실이 될 수 없고, 언젠가 노스탤지어가 될 기억은 왜 이리 아프게 골을 파는 걸까요. 윤단비 감독의 장편 데뷔작 '남매의 여름밤'은 여름밤의 정체된 공기 속에서 복잡다단한 그 시절의 기억을 환기합니다. 누군가는 서글퍼 기억의 고삐를 잡을 테고, 누군가는 먼지 묻은 추억을 털어내겠지요.
한 가족이 재개발이 한창인 동네를 뒤늦게 떠난다. 남매인 옥주(최정운)와 동주(박승준)는 가세가 기울어진 탓에 아빠와 함께 여름방학 동안 할아버지 집에 잠시 기거하게 된다. 할아버지의 2층 양옥집은 온통 푸르지만 낡았고 옥주는 늙은 고목 같은 할아버지가 불편하다. 그중 남편과 소원해진 고모가 할아버지 집에 들어오면서 양옥집은 금세 대식구로 가득 찬다. 다섯 식구는 한 여름을 함께 하며 화기애애한 일상을 보내지만 옥주는 불쑥 연락하는 엄마에 대한 복잡한 감정과 사춘기 고민으로 가득하고, 동주는 엄마를 못 만나게 하는 누나가 불만이다. 한 여름 기세가 꺾일 때쯤 할아버지의 병세가 심해지고 아빠와 고모는 요양병원을 알아보기 시작한다. 옥주는 어른들의 이기적인 결정에 화를 내는데. 두 남매의 여름밤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선은 마냥 어리지 않고, 관조하는 신인 감독의 카메라는 가족의 위기에 굴곡을 파지 않는다. 사그라드는 여름 끝에서 이 가족의 초상은 어떻게 기억됐고, 어떻게 기억될 수 있을까.
여름밤은 무엇이든 일어날 것처럼 길지만 늘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버리지요. 그래서일까요. 여름의 긴 하루는 가족의 얼굴을 곰곰 살펴보게 하고 결국 저 자신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남매의 여름밤'이 기댄 계절도 그렇습니다. 그 시간을 따라 잔잔히 자맥질하는 영화문법은 고로에다 히로카즈의 영향력을 새삼 되새기게 하지요. 할아버지의 양옥집에 내몰리듯 모인 두 세대의 남매가 은유하는 집과 가족의 의미가 그렇습니다. 이미 어른이 된 남매는 집을 통해 '가족이어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반추하고, 어린 남매는 할아버지를 통해 '가족이기에' 나누는 교감을 경험하지요. 영화는 그 가운데 예민한 사춘기 소녀 옥주를 둠으로써 결국엔 모두가 내 것이었던 그 시절에 고개를 끄덕이게 합니다.
'남매의 여름밤'의 인물들은 말하자면 남은 사람들입니다. 이혼으로 해체된 가족 끝에 남은 아빠와 어린 남매, 그리고 이혼을 결심하고 캐리어를 끌고 오는 고모가 그렇습니다. 일찍이 사별하여 혼자가 된 할아버지 또한 남겨진 삶을 조용히 살아가지요. 이혼과 사별에서 남겨진 인물들이 양옥집에 모여 짧게나마 본연의 가족을 이룹니다. 핏줄로 이어진 애틋함은 설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콩국수 한 그릇, 잘 여문 토마토와 수박으로도 거두어지는 게 가족이지요. 그래서 영화는 아빠와 고모, 이 두 남매의 어려움에 크게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사업 실패로 내밀리듯 아버지 집으로 들어온 아빠와 늦은 밤 찾아온 남편을 쫓아내는 고모의 사연은 프레임 밖에 있습니다. 관조적인 카메라가 머무는 곳은 양옥집 내부의 사람들입니다. 더 나아가 남겨진 사람들이 서로를 거두고 종국엔 다시 헤어지는 가족의 애틋한 속성이지요.
영화는 옥주의 시선을 통해 양옥집 가족들을 바라봅니다. 멀리 떨어진 시선은 가족들 사이에서 쉽게 웃지 못하고 늘 언저리에 머무는 옥주의 태도를 은유합니다. 얹혀살고 있는 현실과 불쑥 마음을 쑤시는 엄마, 천진하기만 한 동생은 옥주의 마음을 짓누르지요. 이 아이의 발은 무거워 원목 계단을 울리고 내리막길임에도 힘껏 자전거 페달을 밟아 도망칩니다. 이렇듯 영화 속 도드라지는 마음의 굴곡은 언제나 옥주의 몫입니다. 그러나 가족의 속성에 녹진하게 틈입하는 인물 또한 옥주이지요. 옥주는 할아버지에게 모자를 선물하고, 늦은 밤 홀로 노래를 듣고 있는 할아버지를 보고 계단 뒤에 앉습니다. 조금 구슬픈 시공간을 함께 하는 것이지요. 여름이 흘러가고 이제는 익숙해진 가족들 사이에서 옥주는 엄마에 대한 마음을 펼쳐 보입니다. 여름은 무엇이든 자라나게 하는 계절이지요. 옥주가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받아들인 것은 한 여름 가족들과 살을 비비며 얻은 여린 마음의 결실입니다.
점멸하는 기억은 꿈이 되어 아빠와 고모를 찾아갑니다. 어린 시절의 향수가 고스란히 간직된 양옥집에서 두 어른은 가족과 함께 했던 기억을 꿈에서나마 마주하지요. 하지만 기억은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빠와 고모는 불가역적인 시간을 애써 거슬러 깊게 추억하지 않지요. 추억과 그리움을 짧은 웃음으로 흘러 보내는 것은 어른의 어쩔 수 없음을 끊임없이 반추하게 합니다. "갈 수 없는 먼 곳이기에 그리움만 더하는 사람" 극 중 할아버지가 듣던 옛 노래 가사처럼, 아무리 그리워도 돌아갈 수 없음은 옛 시절 이야기를 여름밤과 함께 갈무리하게 합니다. 그렇게 어른들은 현실의 사정으로 돌아옵니다. 할아버지와 집의 거취에 대해 당사자를 빼고 의논하는 이 두 남매의 모습은 사실 곳곳의 가정이 감당해야 하는 애달픈 현실이지요. 그러니 이 남매를 미워할 수 없습니다. 가족의 구두점은 늘 어쩔 수 없는 선택 위에 써지지 않던가요.
열대야가 물러간 늦여름밤, 노쇠한 할아버지의 부고가 잠든 옥주에게 전해집니다. 느닷없는 죽음은 아닙니다. 생의 끝자락에 선 노인이 몸의 고집을 잃고 실수를 하면 죽음이 가까워졌다고들 하지요. 그렇게 아빠와 고모는 요양병원과 집 처분으로 할아버지의 삶을 일찍이 정리하려 합니다. 이는 어린 남매가 눈치채기엔 너무나 먼 자연의 섭리이지요.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짐작했던 어른들은 목을 놓아 울고 아이들은 울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필연적인 삶의 한 순간이 아이의 마음을 흔들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장례식장에서 옥주가 꾼 꿈이 그렇습니다. 엄마를 기다리는 동주에게 엄마는 오지 않는다 했던 옥주의 꿈에 엄마가 등장합니다. 할아버지의 영정사진을 가운데 두고 온 가족이 상에 모여 앉아 밥을 먹지요. 클로즈업되는 옥주의 얼굴은 이 아이가 담아뒀던 모든 그리움을 드러냅니다. 보고 싶은 엄마의 얼굴, 장례식장임에도 화기애애한 가족의 모습으로요.
마음의 빗장을 푼 옥주가 울음을 터트린 건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던 중이었습니다. 잠시 정면을 응시하던 옥주의 시선이 머문 곳은 짐작컨대 할아버지가 늘 앉아있던 소파였겠지요. 이렇듯 떠난 이의 흔적은 엄마를 만나지 못한 것과 더불어 남겨진 옥주의 마음을 쥐어잡습니다. 마침내 저 자신을 들여다본 옥주는 속울음을 길게 게워냅니다. '남매의 여름밤'은 이 슬픈 시절을 달래줄 방책을 찾지 않습니다. 떠나갈 사람은 떠나갔고, 여름은 흘러갔지요. 그러니 옥주의 긴 울음과 이 시절도 먼 시간 뒤 기억으로 남아 그리워 꿈이 될 것입니다. 삶의 한 시절은 행복만으로 기억될 수 없지 않던가요. 아프고 슬픈 일들도 함께 담아 뒤로 보내는 것이 기억의 섭리입니다. 그 행복과 슬픔을 감내하며 사는 것이 바로 삶의 희로애락이지요. 이 절실한 유년시절을 관조하며 우리의 마음은 어디로 기울었나요. 우는 옥주 위로 흐르기 시작하는 김추자의 <미련>은 슬퍼 흐르는 눈물도, 아렴풋 떠오른 미소도 모두 내 것이라며 그리움을 삭여냅니다.
'남매의 여름밤'은 삶의 한 시절을 떼어내 무심히 지켜봅니다. 기교와 욕심을 버린 카메라는 이제는 머무를 수 없는 곳에 머무르며 마음의 무장을 풀어내지요. 영화는 에두르지 않은 정직함으로 시절의 행복과 슬픔까지도 귀하게 담아냅니다. 가족의 초상은 고로에다 히로카즈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와 닮아있지만 이 신인 감독은 그 정형성에 몰두하지 않습니다. 그 가치를 곡진히 따르되 자기 감수성의 뿌리를 지켜내지요. 여름 끝에서 만난 '남매의 여름밤'은 영화라는 매체가 결국 사람을 향한다는 걸 새삼 기억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