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칠 것 같은 인간, 미쳐버린 신화
폭풍에 갇힌 육체는 영혼을 쪼아 먹는 새를 피할 수 없습니다. 로버트 에거스의 '라이트 하우스'는 미칠 것 같은 인간과 이미 미쳐 신화가 된 인간에 대한 전설입니다. 고립된 섬에 등대지기로 보내진 두 남자의 이야기가 악몽처럼 시작되는 '라이트 하우스'는 깨어났을 때가 더 무서운 몽중몽 상태의 공포를 자극합니다. 4:3 비율의 화면은 필사의 몸부림을 가두고, 회색의 스펙트럼은 정해진 운명을 직조하지요. 고대 신화의 비극에 기댄 로버트 에거스의 영화문법은 선택이 아닌 필연처럼 다가옵니다. 들끓는 욕망으로 붕괴한 인간을 미해결 상태로 남기며 영화는 끝에서 신화를 불러냅니다. 애초에 인간은 이해불능의 욕망을 해석할 수 없고, 신화는 그 무력감으로 쓰인 것이니까요.
1890년대 뉴 잉글랜드의 외딴섬. 토마스 웨이크(윌렘 대포)와 에프라임 윈슬로(로버트 패틴슨)이 4주간의 등대지기 업무를 시작한다. 등대 관리 책임자인 토마스는 에프라임에게 청소나 수리 같은 허드렛일을 시키며 절대 등대 일을 맡기지 않는다. 에프라임은 술에 취해 헛소리를 내뱉고 명령을 일삼는 토마스에게 불만이 가득하다. 그중, 비명을 지르는 바다 새와 뱃고동 소리에 신물이 난 에프라임이 바다 새와 대척하는 일이 발생한다. 토마스는 바다 새 전설을 말하며 에프라임에게 절대 바다 새를 죽이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에프라임은 고된 노동과 참을 수 없는 토마스의 존재에 이성을 잃고 마는데. 때마침 닥친 폭풍에 보급선이 오지 않자 토마스와 에프라임은 섬에 고립된다. 폭풍에 갇힌 기압계는 움직이지 않고, 구조를 기다리던 두 남자는 서로의 심연을 바라보다 광기에 휩싸이고 마는데
'라이트 하우스'의 등대는 곧 남근입니다. 수직으로 비치는 굳건함과 사정의 조건을 은유하는 계단이 그렇습니다. 토마스와 에프라임이 등대에 집착하는 까닭은 등대가 곧 권력이며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등대를 전유하는 토마스에 대한 에프라임의 반발과 분노는 거세된 남근에서 오는 열등감이자 환상의 동력이지요. 더욱이 에프라임은 토마스의 명령으로 등대 관리와는 먼 허드렛일을 떠맡습니다. 인상적인 건, 에프레임의 노동이 등대의 불을 밝힌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광휘는 토마스에게 독점되지요. 실체가 없는 노동으로 에프라임은 욕망의 집합체인 등대에 더욱 집착하게 됩니다. 남근에 대한 정신적, 신화적 해석을 따르자면, 토마스와 에프라임은 권력과 계급이 뚜렷한 부자 관계인 것이지요. 에프라임은 등대를 통해 권력을 전복하려 애쓰고, 토마스는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에프라임의 '거세 공포'를 자극합니다.
그래서 '라이트 하우스'의 앵글은 에프라임을 따라선 수평을, 토마스와 욕망의 대상을 따라서는 수직으로 이동합니다. 이 규칙이 전복되는 유일한 순간이 있습니다. 에프라임이 잠든 토마스를 지붕 위에서 훔쳐볼 때 에프라임의 시선이 토마스의 엎드린 엉덩이를 향합니다. 성적인 긴장감을 유발하는 이 기묘한 시선은 권력의 전복이자, 에프라임이 이루고자 하는 환상입니다. 토마스가 에프라임을 가정 내 '여성'의 위치로 끌어내렸던 것처럼 부부 관계의 내밀한 권력 구조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남근을 소유한 토마스에 대한 에프라임의 경쟁의식이 프로이트의 동일시를 암시한다면, 가정 내 권력 구조는 성적 케미스트리를 유발합니다. 말하자면, 악몽 같은 <결혼 이야기>인 것이지요.
토마스는 술과 등대의 불빛에 늘 취해있습니다. 제정신일 때 그는 엄격한 선장처럼 에프레임을 대하지요. 반면 술에 취했을 때는 헛소리를 늘어놓을지언정 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냅니다. 에프라임은 바다의 신을 흉내 내고 미스터리에 대해 늘어놓는 토마스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영화 초반 에프라임은 술을 멀리하고 돈을 벌겠다는 자신의 목적에 전념하려 합니다. 마치 술에 취해 추태를 부리는 "아버지"와 다른 삶을 살려하는 것처럼요. 에프라임에게 등대지기란 단지 살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음습한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 빛이 필요하지요. 하지만 그의 욕망은 토마스에 의해 좌절되고 토마스의 욕망은 매번 그를 앞지릅니다.
좌절감과 고독, 분노는 에프라임을 술의 취기로 이끕니다. 토마스와 함께 과음하는 에프라임의 모습은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들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에프라임은 토마스의 삶과 욕망에 스며들게 됩니다. 욕망이 더 큰 욕망에 사로잡혀 버린 것이지요. 그렇게 에프라임의 환상이 시작됩니다. 베갯잇에서 발견한 인어상을 품에 안은 에프라임은 파도에 밀려오는 한 남자의 시체를 환각처럼 마주합니다. 더욱이 에프라임은 토마스가 올라간 등대를 훔쳐보다 정액으로 은유되는 점액질과 바다 괴물 크라켄의 흔적을 목격합니다. 크라켄은 미지의 바다가 낳은 공포의 환상으로 전설 속 괴물이지요. 등대에 뿌려진 크라켄의(또한 토마스 웨이크이기도 한) 정액은 등대가 주는 환희와 쾌락의 메타포로 광원에 대한 에프라임의 광기 어린 집착을 암시합니다. 돈을 벌겠다는 목적도, 욕망도 이제 에프라임 윈슬로의 것이 아닙니다. 술과 환상은 그가 만들어낸 인격과 자아를 벗겨내지요. 빈약한 자아 속에서 에프라임은 이성을 잃어갑니다. 가치 없는 노동과 빼앗긴 쾌락에 의한 분노가 그 공백에 해일처럼 들이닥칩니다.
토마스는 에프라임에게 죽은 선원들의 영혼이 담긴 바다 새를 죽이면 불운이 닥쳐온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에프라임은 참을 수 없는 토마스의 존재와 해조의 비명에 괴로워하다 결국 바다 새를 죽이게 되지요. 이는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의 시 <노수부의 노래>에서 영감을 받은 것입니다. 한 선원이 알바트로스 새를 죽이자 배에 갈증이, 그리고 죽음의 저주가 내려집니다. 이는 식수대에 빠진 죽은 새와 폭풍우로 식수를 잃게 될 주인공들의 곤경을 암시합니다. 토마스의 말대로, 바다 새를 죽인 에프라임 때문에 폭풍이 몰려왔을지도 모릅니다. 그 원인이 무엇이든 기압계는 폭풍에 갇혀 움직이지 않습니다. 보급선은 오지 않고, 식량은 모두 젖었습니다. 고립된 섬에서 서로를 미치게 하는 두 남자의 전설이 시작된 것이지요.
토마스와 잔뜩 독주를 마신 다음 날, 에프라임은 암초 위에 누워있는 인어를 발견합니다. 오디세우스를 유혹하던 세이렌의 환상이지요. 인어의 나체를 훑는 에프라임의 손에는 분명한 색욕이 담겨있습니다. 하지만 인어가 눈을 떠 비명을 지르자 에프라임은 달아납니다. 에프라임의 육체는 달아났지만 그의 정신은 일찍이 인어상에 매혹되었지요. 에프라임은 오디세우스처럼 돛대에 묶이지도 않았고, 그를 구하기 위해 노를 젓는 선원들도 없습니다. 이렇듯 세이렌 환상과 인어상은 에프라임의 비극적 운명을 암시하지요. 인어상을 문지르며 맹렬히 자위하는 에프라임이 세이렌과의 성교를 상상하는 장면이 그렇습니다. 욕망의 노예가 된 에프라임은 바다에 수장될 운명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는 바다의 신 프로테우스의 모습으로 에프라임을 꾸짖는 토마스의 번개 같은 예언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무리 작은 네 영혼일지라도, 더 이상 윈슬로가 아니라 이제 바다 그 자체다"
폭풍 한가운데, 술에 취한 두 남자가 누워있습니다. 에프라임은 자기의 진짜 이름을 "토마스 하워드"라고 밝히며 이 섬에 이르게 된 사연을 털어놓지요. 그는 캐나다 벌목꾼 출신으로 자신을 더러운 개라고 부르던 상사를 죽여 도망친 것이었습니다. 그 상사의 이름이 "에프라임 윈슬로"였던 것이지요. "토마스"란 이름의 어원이 "쌍둥이"인 것 역시 의미심장합니다. 토마스 웨이크와 토마스 하워드는 사실 처음부터 동명의 사슬에 묶인 운명인 셈입니다. 다양한 지점에서 서로를 지배하려 하는 웨이크와 하워드의 충돌은 말하자면, 한 인간의 그림자인 것이죠. 다정하게 춤을 추다가도(여성성), 이내 몸싸움을 벌이는(남성성)이 그렇습니다. 더 깊게 파고들자면, 등대를 차지한 토마스 웨이크는 인간의 고등 정신, 즉 이성과 정신 통제(에프라임을 통제하는 것)이며 환상과 욕망에 사로잡힌 토마스 하워드는 그 영혼의 그늘입니다. 또한 어둠이 있어야 빛이 있는 것처럼, 하워드의 노동이 없었다면 웨이크는 등대의 환희를 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웨이크에 대한 하워드의 반항은 이성에 대한 육체의, 빛에 대한 어둠의, 남성성에 대한 여성성의 계급 반란인 것이지요. 하지만 인간 영혼을 단적으로 해부할 수 없듯, 이들의 계급적 위치가 고정된 것은 아닙니다. 섞일 듯 섞이지 않고 웨이크를 위협하는 하워드의 모습으로 전환되기도 하지요.
'라이트 하우스'의 환상적이고 상징적인 언어와 이미지는 그리스 고전 신화를 모티프로 삼고 있습니다. 특히 윌렘 대포가 연기한 토마스 웨이크의 기묘한 이미지와 성질은 바다의 신 프로테우스를 떠올리게 하지요. 바다의 노인이라고도 불린 프로테우스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들여다보며 오직 진실과 예언만을 말합니다. 더욱이 그는 변화무쌍하며 상황에 따라 변신을 일삼습니다. 요리가 맛없다며 불평하는 하워드(에프라임)에게 분노하는 웨이크의 밀도 있는 대사는 그의 신화적 상징성을 부각합니다. 에프라임의 환상 속 괴이한 웨이크의 모습은 그가 절대적 진실을 누설하지 않기 위해 변신하는 프로테우스임 암시하지요. 하워드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자 왜 비밀을 털어놨냐는 웨이크의 엄숙한 목소리가 보이스 오버됩니다.그렇게 하워드는 죄인의 얼굴을 밝히는 토마스 웨이크의 등대 같은 눈, 더 나아가 신의 눈에 발각되지요.
이 장면은 독일 작가 사스카 슈나이더의 작품 <Hypnose>의 레퍼런스입니다. 한 사내의 눈이 내뿜는 광선은 신의 심판처럼 매섭지요. 등대가 천국, 즉 절대자의 구원을 의미한다면 젊은 토마스의 빛에 대한 집착은 살인에 대한 신의 용서와 구원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늙은 토마스, 즉 프로테우스를 붙잡고 속죄 없는 구원에 대한 욕망을 드러냈지요. 붙잡힌 프로테우스는 신화처럼 예언과 진실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신의 눈에 읽힌 하워드의 죄는 용서할 수 없는 것으로 그는 죄인에게 합당한 비극적인 운명을 예고합니다. 하워드와의 몸싸움 끝에 밧줄에 묶여(이 역시 프로테우스를 붙잡는 방법입니다) 매장당하던 웨이크가 "넌 벌 받을 것이다!"라고 외치는 장면이 그렇습니다.
20세기, 남성성의 섹슈얼리즘으로 시대의 한계에 도전한 사스카 슈나이더의 작품 세계는 또 다른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동성애자였던 슈나이더는 남신의 아름다움을 절찬하며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희망했지요. 이 레퍼런스를 따른다면, 두 남자의 케미스트리를 동성애적 담론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워드의 성교 환상에 삽화되던 웨이크의 얼굴과 웨이크가 인어에서 크라켄의 형상으로 변하는 장면이 그렇습니다. 술에 취해 춤추던 두 사람이 입을 맞출 뻔했던 장면도 놓쳐선 안됩니다. 또한 등대라는 남근의 세계에서 의도적으로 비치던 하워드의 젊은 육체는 사스카 슈나이더의 정신을 떠올리게 하지요. 그렇다면 토마스 하워드에게 등대란 억압받지 않은 순수한 욕망입니다. 과거의 죄와 사회적 금기에 옥죄이던 그의 영혼은 등대의 순결한 빛을 통해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그를 미치게 한 것은 욕망과 반대되는 삶을 살아야 하는 바로 그 운명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남성성으로 은유되는 거친 자연과 대립하던 하워드는 금기된 자유를 맛보고 프로메테우스적 비극에 이르게 됩니다. 전통적인 자연(신)에 반기를 든 인간의 최후이지요.
이제 하워드(에프라임)의 광기는 파멸과 가까워집니다. 웨이크의 목에 밧줄을 건 하워드는 그를 개라고 부르며 짖으라고 명령하지요. "난 네가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존재일지도 몰라"라는 웨이크의 앞선 대사처럼, 두 남자의 영혼이 욕망의 반죽에 한데 버물린 것입니다. 이제 하워드는 더러운 개가 누구인지, 도끼로 구조선을 부서뜨린 게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워드를 무급 해고하겠다는 웨이크의 일지는 진짜였을까요? 그러나 현실을 더 굳게 잡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는 더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워드가 도끼로 웨이크의 머리를 내려쳐 죽임으로써 이성과 정신의, 빛과 어둠의 계급투쟁이 끝난 것이지요. 피에 물든 하워드가 등대를 오릅니다. 등대의 광선이 열리고 하워드의 손이 그 벌려진 틈, 카오스(Chaos)로 향합니다. 하지만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빛은 태초에 텅 빈 상태이며, 카오스에서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보나 아무것도 볼 수 없는 혼돈의 상태에서 하워드는 바다 새처럼 비명을 지르고 추락합니다.
그렇게 토마스 하워드는 이카루스처럼 추락해 프로메테우스의 최후를 맞이합니다. 제우스의 불을 훔쳐 인간의 영웅이 되고자 했던 프로메테우스의 욕망은 초월자에 대한 도전이자 오만으로 그려지기도 하지요. 그러니 카오스(신들이 잉태되는 자궁이기도 한)를 엿본 하워드는 이카루스의 날개가 타듯 눈을 잃고 추락합니다. 오만하여 자신이 삼킬 수 없는 욕망을 탐한 인간의,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신의 형벌입니다. 해금(解禁)된 욕망은 극단으로 치닫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신화라면 하워드는 욕망에 미쳐 신의 권위에 도전한 어리석고 나약한 인간인 것이지요. 또한 하워드가 추락한 등대의 나선형 계단은 영원한 생명을 상징하는 달팽이의 뿔과 같습니다. 이는 영 겹의 시간 동안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힌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을 은유합니다. 프로메테우스의 비명을 삼킨 코카서스 산의 골짜기처럼, 하워드의 육체 또한 해우와 바위에 갇힐 것입니다. 하지만 하워드는 바다 새에게 내장을 쪼아 먹히면서도 비명을 지르지 않습니다. 영혼의 탈진에서 오는 단순한 묵음이겠지요. 그럼에도 귀스타브 모로가 그린 비명을 지르지 않는 프로메테우스의 얼굴이 자연히 떠오릅니다. 강인한 신념으로 비명을 삼켜낸 그처럼, 하워드의 묵음은 찰나의 환희라도 간직하겠다는 어리석은 인간의 투쟁일까요. 그게 아니라면, 넝마가 된 육체를 빠져나온 영혼이 바다 새의 입으로 비명을 지르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
절묘한 신화적 상징과 다양한 메타포로 빗어진 '라이트 하우스'는 표현주의 사조의 마지막 필름처럼 다가옵니다. 무겁고 극적인 그림자, 그로테스크한 미장센, 연극적 밀실이 주는 폐쇄적 공포감, 심연을 파헤치는 대사는 섬이라는 현실의 비현실성을 극단화합니다. 미학적 관습에 대한 반동이었던 표현주의 기법은 '라이트 하우스'의 모반(謀反)적 어조와 유기적으로 얽혀있습니다. 그러니 광휘와 대조되는 어둠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환상과 악몽의 색, 흑백뿐입니다. 등대섬의 흉흉한 파고에 물러서지 않는 윌렘 대포와 로버트 패틴슨의 연기 또한 '라이트 하우스'의 맹렬한 분위기에 힘을 더합니다. 윌렘 대포는 종잡을 수 없는 토마스 웨이크의 성질과 힘을 영혼까지 과시해냅니다. 하워드를 연기한 로버트 패틴슨은 이미 넘어선 자신의 연기적 한계를 또 한 번 넘어섰습니다. '라이트 하우스'는 그의 최고 연기작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끝없던 뱃고동 소리가 사라진 지점,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흐려집니다. 정신을 깨우는 소리가 사라지자 섬이, 환상이, 빛이, 욕망이 두 남자를 광기로 몰고 갑니다. 미칠 것 같은 인간을 거울처럼 대면하다 결국 한 인간이 신화에 이릅니다. 미칠 것 같은 인간이 미쳐버린 신화가 된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