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한 한 해의 마무리를 바라며
12월이 시작되었다. 친구가 말했다. “별로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또 한 해가 이렇게 훅 가버리는구나.”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올 한 해 이 친구에게 얼마나 크고 작은 일이 많았는지.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할 것 까진 없으나 큰 점을 찍을 만한 사건도 몇 가지나 있었다. 그 말을 한 바로 전날에도 부모님 집에서 독립하고 나와 처음으로 월세에서 벗어나 전세로 계약한 새로운 집에 이사를 했다. 그 일의 마무리를 도우러 내가 서울까지 올라간 참이었다.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룬 것 까진 아니지만 지긋지긋한 월세의 부담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것만으로도 쾌거다. 혼자서 서울에 몇 없을 적당한 가격의 전셋집을 찾아 헤매고 전세 대출을 신청하고 계약하고 이런저런 조율에 이어 마침내 이사까지, 이 모든 과정을 혼자 해내느라 애썼을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연말이면 익숙한 톤으로 이렇게 내뱉고 마는 것이다. “하는 것도 없이 나이만 먹네.”
나 또한 연말이 되면 대체 올해 뭐했다고 일 년이 또 이렇게 금방 지나갔나 싶다. 학생 때나 회사원이었을 때는 대체로 학교 생활과 회사 생활을 기준으로 한 해가 정리되었던 것 같다. 어떤 프로젝트를 맡아서 해왔고 마무리했으며 그 사이에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지. 여름휴가에는 누구랑 어딜 갔었어. 퇴근 후에는 주로 뭘 했더라. 내년이면 여기 들어온지도 몇 년 차네. 이제 대리급이 되는 건가? 직급은 됐으니 내년엔 연봉이나 좀 제대로 올려줬으면.
그러나 지금은 회사를 다니는 것이 아니니 누가 일 년 더 일했다고 자동으로 연차 올려주고 직급 올려주고 그에 맞춰 연봉 올려줄 일이 없다(물론 회사에 있을 때도 연봉이 안 오른 일은 몇 번이나 있었지만). 시기 맞춰 회사 시스템을 통해 연말정산을 하며 한 해 얼마 벌고 얼마 썼나 들여다볼 일도, 연간 성과보고나 연차 계획을 제출할 일도 없다. 무언가 계속 해왔던 것 같은데 정신 차려보면 실체는 없고 시간만 훅 가있다.
스스로 돌아보고 정리 해나가지 않으면 진짜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가버리는 것 같아 적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했던 것처럼 다이어리에 일간, 주간, 월간으로 할 일을 쓰고 체크해나갔다. 수업과 개인 프로젝트 외에도 그 날 시간과 공을 들여한 것은 모두 적었다. 집안일만큼 허무하게 지나가버리는 일도 없어서 그것도 썼다. 이 날은 요가복과 니트류를 따로 빨아 널고 그 외의 옷가지도 빨아 건조기에 돌림. 저 날은 거실 청소. 그 날은 화분에 물 줌. 사실 매일 쓰는 것이 쉽지는 않은 일이라 요즘은 거의 주간으로 정리하는 편이다.(물론 그것도 빼먹을 때도 많지만). 이렇게 써놓은 것들을 휘리릭 돌려보면 시간 그냥 다 가지 않았구나 싶다. 내가 밀도 높게 또는 옅게 쓴 시간들이 켜켜이 정리되어있다.
작년 말에는 올해 한 일과 내년에 하고 싶은 일 리스트를 정리해보았었다. 남편에게 각자 정리해서 공유해보자고 했는데 뭘 정리하는데 특히 써서 정리하는데 취향이 없는 남편은 어물쩡 넘어가버리는 바람에 이것은 나만의 연말 이벤트가 되었다. 며칠 전 오래간만에 그 리스트를 들여다보았다. 계속해서 다짐하고 방향과 일정을 맞춰가며 계획을 달성하려 하지 않았음에도 계획한 것 중에 많은 것을 성취했음에 스스로 많이 놀랐다. 굳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내가 이뤄가고자 하는 삶의 방향성과 맞닿아 있는 내용이라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누군가는 리스트에 있는 모든 일을 100% 이뤄내지 못했음을 자책할 수도 있겠지만 대체 누가 계획대로 다 하고 살 수 있단 말인가?! 이 정도 했으면 만족한다. 올해 참 잘 살아왔다. 누군가는 리스트에 적은 것의 반도 만족스럽게 해내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성취한 것이 있다. 아무 한 것도 없이 1년 보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어쩌면 어떤 이는 리스트에서 정말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경우는 두 가지 원인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 째는 리스트 자체에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이나 거창한 것만 잔뜩 쓰여있는 경우이다. 나도 사실 자주 그랬다. 연초, 학생 때는 방학 초반에 길면 일주일, 짧으면 이틀 만에 손을 놓아버리게 했던 그 수많은 계획들을 기억한다. 그럴 거면 계획표 양식은 왜 그렇게 고민해서 만들었나 싶게 했던 속에 들어간 내용들. 스스로를 탐구하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과 어떤 삶과 일상을 살아가고 싶은지에 대한 충분한 고민이 이 리스트를 수정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정말 상황이 안 좋았을 수 있다. 내가 원했던 일을 생각하기에는 밀려오는 파도에 휩쓸려가지 않기 위해서만도 안간힘을 썼어야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내 마음이 그저 스스로의 존재를 버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워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 듯 보였지만 실은 고군분투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번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그 시간이 속히 지나가길, 그 버팀의 시간이 하나의 경험이 되길 그래서 다시 자신만의 리스트를 만들어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파탄잘리 [요가수트라]에는 아쉬탕가 요가(요가의 8단계)에 대해 기술되어있다. 그중 두 번째 단계인 니야마(Niyama, 권계), 즉 개인적인 수행에 적용하는 행동 규율의 내용에는 산토사(Santosa, 만족)가 포함되어 있다. 이는 부족하다는 생각에 집착하지 않고 충족된 마음의 상태를 가지는 것으로, 나의 현 상황과 바람의 차이로 부조화를 이루는 상태에서 벗어나 평온해지는 것을 이른다. 어떻게 보면 좀 정신승리적인 듯 하다. 하지만 '나는 다 만족한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라 말하며 개인의 성숙을 이룰 수 있는 모든 행위를 포기하는 태도이기보다는 나에게 주어진 상태/상황(사후)을 받아들이는 것에 중점을 둔다. '나는 최선을 다했고 결과를 받아들일 것이다.'라는 태도를 말한다.
나는 그 친구에게 내가 기억하는 올 한 해 친구에게 있었던 일들을 간단히 훑어주었다. 각각의 상황마다 얼마나 마음을 썼고 잘 해내 보려 노력했었는지, 기뻐하고 또 안도했었는지, 슬퍼하고 쓰라려했었는지, 흥분하고 설레었는지, 이런 부분은 말해주지 않아도 스스로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주었다. “너 올해도 한 일 많았다. 충분했다. 12월은 뭐 더 할 것도 없으니 그저 숨만 쉬며 하던 일 하고 지내라.”
올해 많은 일들을 겪은 다들 그리고 나 또한 남은 12월을 평온하게 보내며 한 해를 잘 마무리하고 새로운 설렘으로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Om Shanti Shanti Shant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