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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요가생활 Feb 07. 2021

너의 이름

나의 기원을 담아

20대 중반의 어느 날, 나는 내 아이의 이름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어. 언젠가 생길지도 모를 상상 속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보았지. 그때 최종적으로 선택한 이름은 “이린(黟麟)”이었어. 당시 ‘린’이라는 발음이 마음에 들어서 한자를 찾다 기린 린(麟)을 찾게 되었는데, 우리가 아는 목이 긴 동물인 기린이라는 뜻 외에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상상 속 영수의 이름이기도 하다는 것을 발견했지. 검은 기린, 뭔가 판타지적인 느낌이지? 그땐 그런 걸 멋지다고 생각한 시절이었어. (사실 어릴 적 보았던 판타지 만화 속에 ‘흑기린’이란 이름의 영수가 나오기도 했고.)


너를 가지고 나는 진짜로 내 아이에게 이름을 줄 기회를 얻었어. 그 첫 기회는 초음파로 네 심장박동을 처음 들은 날 결정한 태명이었단다. 산부인과에서는 초음파 영상을 특정 어플에 올려주는데, 그 영상을 보려면 회원가입이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태명을 입력해야 했어. 아빠가 장난 반 진담 반으로 늘어놓은 수십 가지 요상한 이름을 뒤로하고 나는 일단 “초록”이라고 입력해놓을 테니 다른 게 생각나면 고치자고 했어. 아빠는 그 태명을 마음에 들어했고 그렇게 널 초록이라 부르게 되었단다. ‘일단’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초록이란 태명은 그전부터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거였어.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인 늦 봄에서 초여름에 걸쳐있는 시기였어. 나는 그즈음의 풍경을, 풍경이 변화하는 모습을 정말 좋아한단다. 봄을 장식하던 화려한 꽃들은 지고 연둣빛 잎들이 무성하게 돋아나며 녹음이 짙어지고 풍성해지는 아름다운 계절. 그 해의 그 계절에 나는 집 근처 강변 생태공원을 산책하러 자주 나갔어. 상당히 넓게 조성된 공원이라 강과 넓은 잔디밭과 푸른 잎들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그 산책길에서 널 초록이라 불러야겠다고 결심했어. 조심스러웠던 극 초기를 지나 네 심장이 처음 뛰는 것을 발견한 날, 너는 내 안의 초록이 되었단다.


어느덧 배가 꽤 불러왔을 때쯤, 나는 같은 공원을 운동 겸 산책 겸 걸으며 네가 태어난 후 불러줄 이름에 대해 자주 생각했어. 초록이란 태명이 워낙 마음에 들어서 그런 푸른 기운이 담긴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고, 초여름의 풍성한 기운을 담은 이름의 후보들을 써 내려가 보기도 했지. 내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의미인 조화/평화의 뜻을 담아 ‘화’ 자가 들어간 이름들도 리스트에 추가했고, 네가 인생을 평안하게 살길 바라는 마음에서 ‘안’ 자가 들어간 이름들도 지어보았어. 중성적인 느낌의 부드러운 이름이었으면 했고 너무 흔한 이름은 또 피하고 싶었지. 알다시피 아빠 성이 ‘석’으로 좀 특이하고 강하다 보니 성씨에 어울리는 이름을 정하는 것도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단다. 산책하며 인명 한자와 뜻을 조합해본 것은 물론이야. 이 정도만 이야기해도 내가 얼마나 이름 짓기에 고심했는지 알겠지?


그렇게 수많은 이름 후보들 중 네 아빠와 의논하면서 지우고 또 쓰고 지우며 출산 직전까지 세 개 정도의 이름을 남겼어. 하나가 딱 마음에 들어버리진 않아서 네가 태어나면 얼굴을 보고 그중에 제일 잘 맞을 것 같은 이름을 선택하기로 했단다. 그리고 네가 딱 태어났는데, 생각처럼 그 하나가 확 떠오르지 않더라. 우리가 ‘초록’이라는 태명을 워낙 마음에 들어했다 보니 대체할 이름을 찾질 못하겠더라고. 넌 그냥 너무 작고 예쁘고 귀여워서 계속 초록이라고 부르고 싶었어.


내가 후보로 두었던 이름들은 어쩐지 좀 아련하고 사색적인 느낌의 것들이 많았어. 서정시인이나 단편소설 작가 같은, 어딘가 좀 현실에서 약간 비켜서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적인 느낌 알겠니?(물론 저 직업군의 사람들이 실제로 그렇다는 건 아니야. 그냥 내 마음속 이미지이지). 내 20대 중반의 판타지적 감성이 아직 남아있던 모양이야. 그러다 네가 태어나고 하루 이틀 사이 선천성 심장기형 진단을 받고 급하게 수술을 하고 추후 그다지 오래 버티지 못할 수도 있다는 현실이 밀어닥치면서 네 이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어. 나는 그런 연하고 아련한 느낌의 이름을 너에게 붙여줄 수가 없더라. 좀 더 진하게 현실 세상에 발을 딱 붙이고 있을 것 같은 이름을 다시 생각해야 했어.


그렇게 떠올린 이름이 네 이름 ‘진우’야. 진우라는 발음을 떠올리고 네 아빠에게 말했을 때 그 이전의 어떤 이름보다도 마음에 들어하더라. 그렇게 발음을 확정 짓고 한자 탐색에 나섰어. 평소 사주팔자 같은 것에 연연하는 편이 아닌데도 혹시 작은 흠이라도 있을까 인명 한자사전과 음양오행을 따져 분석해주는 프로그램을 붙들고 한참을 씨름했단다. 뜻이 마음에 들어 프로그램에 넣어 봤을 때 총점이 높아도 초년운이 별로라 고하면 또 피했어. 중년이나 말년은 상관이 없는데 초년운이 나쁜 건 너무 찜찜하더라고. 그렇게 집착적으로 매달려 난시에 따른 사주를 잘 보완해주어 총점수도 높고, 초년운은 물론이고 평생의 운이 좋다고 하는 이름을 발굴해냈단다.(작명소에 갔으면 쉬울 일 아니었냐고? 그런 건 결과를 얻었을 때 만족감이 덜하지.)


너의 이름은 석진우(石晉宇), 나아갈 진(晉)에 집 우(宇) 자를 썼어. 처음엔 이 한자를 ‘집에 가자’라고 해석해서 지금의 우리 상황에 대입하며 한참을 어이없다는 듯 울며 웃었지만, 이 우(宇) 자는 우주(宇宙)에 쓰이는 첫 글자로 우주/천하를 뜻하기도 해. 그래서 다시 내 나름대로 해석해보자면 “일단은, 집으로 가자. 그리고 그 후엔 세상으로 나아가자.”라는 의미가 된단다. 어때? 마음에 드니?


이 이름으로 출생신고를 하고 기념 등본을 받았는데 우리 이름 밑에 적힌 네 새로운 이름이 너무나 어색한지. 초록이는 ‘귀여운 내 새끼!’ 같은데 석진우는 너무 어른 이름 같았거든. 석진우 씨라고 불러줘야 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자주 불러줘야 좋다는 말에 입에 붙도록 연습하고 있어. 아직 불쑥불쑥 초록이가 나오긴 하지만 말이야. 네가 내 눈앞에 있고 네 얼굴을 보며 불러줬다면 훨씬 빨리 익숙해질 수 있지 않았을까? 보고 싶다, 우리 초록 진우. 엄마가 많이 사랑해.


p.s. 네 정식 이름을 지어주긴 했지만 이 편지 시리즈에선  널 계속 초록이라고 부르기로 했어. 애칭 하나 있는 정돈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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