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 무량수전 - 무섬 마을
정말이다. 여행의 시작이 저 한마디에서 비롯되었다. 팔도 지도 어딘가를 서성이던 손가락은 단숨에 부석사를 품은 소도시 '영주'를 가리키게 된다. 교과서의 어딘가에서 여러번 줄을 긋고, 언젠가는 문화재 이미지를 뒤적이며 과제 속에 첨부했을 법도 한 '배흘림 양식'에의 로망과 애틋함으로 영주행을 결정한다. 둥글둥글한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누군가의 이름같은 곳. 그 외에 내가 추가할 정보라고는 볼빨간사춘기를 배출해낸 소도시라는 점 정도가 최신 지식의 전부인 이 곳. 봄이 오는 속도보다 반 박자 정도 빠르게 영주를 찾았다.
- 우리만 간직하고 싶은 국내 소도시의 매력
노란빛 기운이 살짝 비쳐올 무렵의 꽃나무와, 드문드문 풍기는 나무와 풀 냄새가 봄 기운을 느끼기에는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 북적이지 않는, 사실상 적적한 기운마저 드는 부석사 주변을 맴맴 돌며 소도시의 평화를 누린다. 어찌보면 이 고요함을 원해서 찾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고, 만족스러운 뒷짐을 지게 된다. 한 손에는 다 먹고 남은 사과즙 봉다리, 그리고 사과말랭이가 들려있으니 뿌듯한 기분도 놓치지 않았다.
연이어 비슷한 기대감을 띠고 발걸음을 돌렸던 지난 여정을 오늘과 대조하게 된다. 교토의 은각사에서 다급하게 풍경을 눈에 넣고, 기록하느라 체할 뻔(?)했던 기억이 그것이다. 카메라를 켜서 그 귀한 풍경을 담는 것이 어떤 미션인 것마냥 노력했던 기억이다. 그치만, "고요함과 여유"라는 도시의 이미지만을 소비했을 뿐이지 그 도시 속의 나는 여전히 '봐야할 것들', '사야할 것들'에 사로잡혀 진득하게 누리는 것에는 분명 실패했다.
시간을 여기에 다 팽개쳐둔채 마음껏 이야기하고, 쓸데없이 기대어 서고, 주저앉기도 하면서 보내는 이 날의 오후가 어쩜 이리도 마음에 들었는지. 그렇게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가 결국은 '배흘림 기둥'을 마주본다. 중간이 뚱뚱하고 위 아래가 모아지는 형태라 항아리와 같은 모양을 가지고 있다. 곰브리치는 엔타시스(배흘림, Entasis) 양식을 '살아있는 물체가 힘 안들이고 짐을 지고 있는 형상'과 같다고 묘사했다. 목조 건축 속 탄력적인 '배부른 곡선'을 찰칵- 기록하며 또 한 번의 국보 여행을 다짐한다. 그 동안 너무 먼 곳만 향했던 건 아닐까 미안하고 쑥스러운 마음도 한아름 담아 앞으로 향할 소도시들을 헤아려 본다.
무섬마을의 한옥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국가민속문화재 제278호로 지정된 이 곳은, 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이 마을을 감싸면서 마치 마을이 물 위에 떠 있는 섬과 같이 보인다고 해서 '무섬마을'로 불리게 되었다. 흙과 나무 냄새가 화려하게 여정을 감싸주는 기분이라 마을에 들고 나서면서도 정화된다는 기분이 들었다. 장독들을 밀치는 소리, 고무호스가 바닥에 흩뿌리는 물줄기, 자갈과 거친 흙모래알들이 까끌거리며 만들어내는 내음새나 소음들이 한껏 분위기를 돋워주었다고나 할까.
봄이 한 장 넘겨온 계절이라고 해도, 아직 밤공기는 쌀쌀했다. 슬짝 들어오는 싸-한 바람과 따뜻한 방구들 온도를 조합시켜서 낭만적인 밤 분위기를 만든다. 꽁꽁 닫아둔 문 탓에 후덥지근 해질 즈음에는 잠시 공간을 틔워서 한번씩은 공기를 식혀주었다. 자정이 가까워질 때쯤에는 지류를 따라 걸으며 선선한 강바람을 쐬기도 했다.
통일감 없는 색채의 빚은 술잔에는 차를 따라 마시기도, 소주 한 잔을 콸콸 털기도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로 금세 밤을 채워낸다. 이제 막 들이닥치기 직전이긴 하나, 봄의 기운을 열렬히 응원하며 영주 사과즙 한 팩을 또 꺼내어든다. 아, 말랭이는 아무래도 아까워서 서울까지 온전히 챙기기로 했으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고, 했다. 그리고, 배흘림 기둥을 보러가자고 물어봐준 그 최초의 질문이 너무나 고맙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