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Fete Coffee - 향미사
가는 도시마다 빼놓지 않고 하는 행동이 있다. 일명 '카페 놀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주인의 취향이 강하게 녹여져 있는 커피집 몇 개를 고르고, 시그니처 커피 메뉴를 골라 마시고, '처리하려고 가져 온' 일들을 펼쳐서 '하고 싶은 만큼' 하는 것이다. 이 일련의 카페놀이를 수행하노라면 여유로운 시간의 마디들이 더 잘 체감이 되고, 그래서 이 일과를 내가 제대로 운영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마음에 드는 공간에서 내 시간을 제대로 쓰다가는 기분이랄까.
게다가, 꽤 누적되어 온 도시여행에서 이 리추얼의 비중은 점점 커진 듯도 싶다. 또한, 잠시간만 이 도시에서 얹혀있을 이방인이, 살면서 처음 방문한 커피 내음새 넘치는 공간에 실망한 경험은 거의 없었다.(그만큼 귀신같이 좋은 곳을 골라낸다는 증거쯤 된다고 생각하니 뿌듯해진다.) 경주에서도 흐트러짐 없었던 즐거운 놀이의 기억을 기록한다.
최근 경주 황리단길(황남동과 사정동 사이의 번화한 거리)에 한옥 무드에 (모순적이게도) 일본식 식사, 디저트 메뉴를 취급하는 '새 가게'들이 많이 들어서서 눈은 즐거웠으나 크게 당기지가 않았다. 거리에서 대릉원으로 향하는 길에 오래가는 커피점이 있다는 말에 발걸음을 서둘렀다. 경주에서 터줏대감을 논하기 조심스럽지만(?) 새 것들을 압도하는 존재감이라고 하니 내 취향임에는 틀림이 없다.
눈에 잘 띄지 않아서 두어번 빙글거리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이민다. 운이 좋게 허락된 평일 오후이기도 하고, 날이 꽤 쌀쌀한지라 여행자들도 로컬들도 발길을 줄이는 시즌이었다. 그래서인지, (내심 바라던 바이지만) 카페에 들어선 것은 오로지 나뿐. 오늘 카페놀이의 시작이 좋다. 달콤한 커피에 시원한 크림을 올린, 아인슈페너의 한 종류인 듯한 시그니처 메뉴 앙페트(En Fete)를 주문했다.
블랙이 압도하는 인테리어 속에 빼-꼼 고개를 들이민 재치있는 컬러 디테일이 재밌다. 꽉꽉 찬 따뜻한 공기에 음악이 흘러나오는 스피커의 진동이 느껴질 정도의 적막이 감사하다. 전세 낸 이 기분 너무 좋잖아. 흡사 개인 작업실에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커피잔을 내려놓고, 패드에 펜슬을 서걱이는 소리마저도 내 것이다. 오전에 준비한 읽을 거리와 드로잉 과제를 폈다.
아침을 건너 뛴 탓인지 달달한 커피를 쭉쭉 잘도 흡수한다. 커피향이 꺼지기도 전에 서둘러 두번째 잔을 준비해야겠어. 다음으로는 새까맣고 뜨거운 블랙 커피로 주문했다. 머그잔에 커피가 한 가득 넘치게 담겨있어 후룩이느라 컵 아랫편을 뒤집어 보는 것을 잊었으나, 마리메꼬의 무늬가 연상되는 스칸디 패턴이 예쁜 머그였다. 맛은 말해 무엇, 하지만 어떤 잔에 담기느냐에 따라 커피 맛이 한결 더 마음에 들때가 있지.
잃을 수 없는 핸드드립 전문점. 자주 지나던 대로에서 '경주 체육관'이라는 오래된 간판에 가려져 보지 못하던 커피점을 발견했다. 옛 느낌을 그대로 살린 아웃테리어가 구미당기는 힙함을 띄게 한다. 떠나는 날의 아침을 깨우기 위해 이른 시간에 향미사를 찾았다.
'향미사'는 다양한 향미의 커피를 선별하여 제공한다는 의미로 지어졌다. 샵인샵 방식으로 책방 '지나가다'가 입점해있다. 그래서, 독립서적들과 귀여운 굿즈들을 둘러보는 것은 또다른 재미다. 이번 카페놀이는 온전한 집중을 허락한다는 계시인지, 항상 나 혼자만의 것이었다. 슬슬 적적해질 타이밍인가 싶다가도, 그런 기분의 습격을 받을 즈음이면 항상 여행은 막바지에 이른다. 실제로 향미사에서 마신 커피가 '신라 카페놀이'의 마지막 잔이었군.
'처리하려고 가져 온' 일들의 정체란 것은 사실 '쓸고퀄'의 콘텐츠를 만드는 일이다. 글감 작성을 위해 스크랩한 자료나 클리핑해둔 텍스트들을 몰아서 읽고, (요즈음은 영상으로 보는 일도 잦아졌다) 글감의 개요를 기록한다.
이번 여정에서는 특히 드로잉 과제를 수행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사물이나, 어제 본 영화의 포스터, 지난 주 읽은 소설의 표지 비주얼 등을 매일매일 그려내기로 했던 것. 카페놀이 중에는 그 날 마신 커피잔의 패턴이나 음영을 그리는 것도 물론 포함될 수 있었다.
누군가는 '거참 별거 아니네'라고 생각하려나? 적어도 나에게는 너무 소중하고 내 안에서 쌓여가는 '인풋'같아서 꽤 부지런히 하는 행위이다. 어느새 몇 년에 걸쳐 쌓인 내 아카이브에는 이 작업물의 비중이 꽤 높으니까. 사실 손이 심심한 도시 여행자나 주어진 시간을 재밌게 쓰고 싶은 누군가에게는 꼭 권하고 싶다. 게다가 요즘은 '혼자, 집에서' 쓰는 시간의 비중이 유난히 높아졌으니, 정주행에 눈알이 빠지는 기분이라면 이 '생산활동'을 힘껏 추천한다. 이 활동을 함께 할 누군가를 찾아보는 것조차 또다른 생산의 계기가 되지 않을까.
부지런히 터미널 근처에 도달해서 눈에 띄는 것은 한옥 지붕 아래에 자리를 튼, 다름아닌 스타벅스다. 민첩하게 동선을 옮겨오느라 버스 시간까지는 아직 40분이나 남았다. 카페놀이는 끝났지만, 마지막 커피는 이 곳이란 사실에 괜시리 웃음이 난다. 쉽게 눈에 걸리고, 손에 잡히니 어쩔 수 없지, 뭐.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워밍업을 한다고 치자.
역시나 후룩-하고 한 모금 마시니 몸이 녹아 기운이 좋아진다. 카페놀이에서 마셨던 수 잔의 커피가 아른거리는 순간이다. 그렇게 한 잔을 마시고 나니 헤드라이트를 켜고 터미널로 들어서는 서울행 버스의 모습이 보인다. 좋아하는 공간에서 또 부지런히 나만의 생산활동을 할 가까운 시일을 기약하며 경주에게 안녕을 한다.
잘- 마시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