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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링 Apr 11. 2021

목포, 비도 오고 그래서 커피를 마셨다.

카페 WELL coffee - 슬로 - 인스파이어링 커피 - WTVR



혼란한 연말연시를 보내고, 한시름 놓을 수 있는 타이밍에 막바로 기차표를 샀다. 이맘때쯤 빡빡하게 가까운 타국의 도시 여행을 다녀오는게 룰이었는데, 애석한 마음으로 즉석 일정을 계획했다. 계획이랄 것도 없는 것이, 딱히 공들여 찾을 필요가 없게끔 볼 것도 먹을 것도 다양한 도시로 결정하고 최소한의 패킹만 후다닥 마쳤다. 멀게만 느꼈지만, 사실 기차로는 3시간도 안되어 도착할 수 있는 곳, 목포로 정했다. 




풍경의 서사, 비가 내리기 시작한 도시 한 가운데에서


신이 나서 오전 내내 골목길을 거닐었는데, 해가 쨍할 무렵부터 봄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그러고보니, 먹구름이 드리울 무렵부터 인적이 사라지기 시작했음을 깨닫는다. 그치만 오늘만 잠시 왔다 가는 비라는 것에 안도하며, 일정을 재배치 한다. 이동을 줄이고, 신중하게 고른 저녁을 먹으러 가는 동선 중간에 포진된 공간들을 귀신같이 찾아내고, 휴식처로써 배열한다. 


걷고, 마시고, 걷고, 쉬면서 천천히 가는 목포의 첫 날이 되겠다. 


미술관의 기획전 타이틀과 그 아래의 풍경이 묘하다. 



춥지 않은 봄비는 꽤 운치있지만, 꽃이 뚝뚝 떨어지는게 아쉬울 따름





알록달록한 취향을 담아, WELL Coffee


오늘 처음으로 배낭을 내려놓을 커피집을 물색했다. 목포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들르게 되는 근대역사관 주변에서, 우산을 들고 가만히 서성이던 중 발랄한 공간 하나를 발견한다. 기차에서 내린 뒤 처음으로 여유로워지는 순간. 카페 바깥에서부터 한껏 색깔을 부려놓은 티가 난다. 첫인상이 마음에 든다. 


비도 오고 그래서, 커피를 마셔야겠다. 

촉촉히 젖은 콘크리트의 색깔에서 빛을 발하는 발랄한 공간



단숨에 마음을 빼앗긴 풋사과색의 소파와, 양감이 마음에 드는 소품들

자타가 공인하는 알록달록 애호가로서, 시선을 두는 곳마다 갖고 싶은 것들 투성이였다. 미래의 집일지, 사업장일지(?) 알 수는 없지만, 내 뜻대로 공간을 꾸밀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이런 무드로 꾸미고 싶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옷차림의 채도는 조금 떨어진듯 하지만, 여전히 알록달록하게 주변을 꾸미고 싶노라는 초심은 잃은 적이 없다.

뜻밖의 쇼룸을 보게되어 기분이 좋아졌고, 모순적이게도 커피는 블랙을 일관했다는 후문이다.


베리를 떡하니 올려둔 액자와, 다락방 한 켠 소녀의 화장대 같은 소품들



홍학, 오렌지랑 망고를 포개어 둔 의자, 나무와 나뭇잎 색깔.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다.





적막한 캐러멜 공방의 운치, 슬로 (Slow) 


오전 커피를 한잔 마시고, 다시금 발걸음이 바빠졌다. 왠지 나만 들여다보는 듯한 골목을 들쑤시는 것이 여행의 잔재미라고 생각하는 편이라, 우산을 들고서도 거침없이 돌아다녔다. 그치만, 한 번 시작된 빗줄기는 점점 거세어져서, 새하얀 배낭이 얼룩덜룩 축축하게 젖어버릴 정도였다. 긴급하게 가장 가까운 대피소를 물색했다. 주택가로 쏘옥 들어가야 나오는 커피집. 쏴아 하고 쏟아지는 비를 털어내고, 문을 꾹 닫으니 대단히 고요했다. 몰래 들어선 비밀 공방 같은 느낌이었다.


갑작스러운 폭우에 배낭과 외투가 모두 젖었다. 대피소로 입장하는 기분



고요한 카페 속에서 얼굴을 포개고 이 곳을 지키는 중 



그도 그럴것이 수제캐러멜과 마카롱을 주 메뉴로 하는 카페라, 카페 주인분께서 한창 캐러멜을 만들고 계신 중이었다. 달큰하고 따뜻한 냄새와, 주걱으로 아래가 타지 않게 젓는 소리, 둥둥-하고 울리는 스피커 소리가 전부였다. 달다구리한 것들과 차 한 잔을 시키고, 적잖이 젖은 옷가지와 몸을 테이블에 늘어뜨리고 휴식을 취했다.

거의 먹어본 적이 없었던 수제 캐러멜은 야무지게 꼭꼭 씹어 삼켰다. 한 박스들이로 선물상자를 구매할까 하다가, 도저히 비를 헤치고 사수할 자신이 없어서 포기했다. 쭉 조용하던 공간에 캐러멜을 사러 도착한 단골 고객이 들어서며 다시 활기가 들어찼다. 바톤 터치를 하듯, 기지개를 켜고 다시 우산을 펴고 나선다. 다행히도 빗줄기가 잦아들었다. 



기본, 소금, 시나몬 수제 캐러멜과 마카롱까지. 살짝만 올리려던 당이 과해졌다.





요즘 카페의 전형, 인스파이어링 커피 (Inspiring Coffee)


흥미롭게도, 최근 망원동이나 성수동에서 짜맞춘듯 한 '힙한 카페'의 기본 스펙은 꽤 정형화되어있다. 프랜차이즈 커피점이 아닌, 개인 카페에서 종종 두드러지는 경향성이다. 이 스펙(?)이 목포의 커피집에서도 나타났다. 다만, 훨씬 밀도가 낮아서 여유를 만끽하기가 좋았다.


카페에서의 업무, 여가를 즐기는 경향의 대세화는 '초단기 임대업의 원리'라고 하는 재미있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나에게 맞는 위치와, 깨끗한 인테리어를 갖춘 곳에서 메뉴값을 지불하고 '잠깐의 생활'을 하는 것이기에 고개가 금방 끄덕여졌다. 다만, 서울에서는 좋은 공간에 가도 그 가성비가 좋지못하다. 메뉴 값으로 지불한 식음료만 해치우고 쫓기듯 나오거나, 머물더라도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치만 목포에서는 그 가성비와 만족도가 대단히 높았다. 낮은 밀도의 공간이 휴식을 즐기러 오는 기대감을 완벽히 채워주기 때문이다. 



번화했지만 낡은 것들 사이에서 존재감이 느껴지는 곳



';요즘 카페' 스펙을 다 갖췄다 : 하얀 벽의 질감, 액자, 조명, 기하학적 모빌.



비가 마른 목포 시내의 거리에 한가운데에 놓여있었던 인스파이어링 커피는 그런면에서, 솔직히 특색있는 카페라고는 할 수 없었다. 다만, 전형적인 '요즘 카페'의 모습을 갖추었지만 서울에서 만났던 유사한 공간들보다 훨씬 기분 좋은 시간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속삭이는 사람들과, 적당히 귀여운 메뉴(누룽지 휘낭시에)에 즐거워하며 커피 한 잔을 훌쩍 마셨다. 비슷한 모양의 공간이지만, 시간의 가치는 훨씬 높게 획득했다. 



디자인 서적과 대형 액자들 속에서 누룽지 휘낭시에를 씹었다.





낭중지추의 매력, WTVR (Whatever)


목포 여행이 끝을 향해 달려갈 무렵 우연히 발견한 카페,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공간에 놓여있었던 쨍한 색감의 왓에버(WTVR). 어린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풍경이 쉽게 보일 정도로 주택~아파트가 놓인 반경의 한 가운데에 위치했다. 이 카페만 삐쭉하게 돋보이는 느낌이 들었다. 1인석에 쭉 늘어앉아서 개인 업무를 보는 이들과, 강아지를 안고서 즐겁게 대화하는 사람들. 나를 제외하고는 그야말로 '동네 마실'을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터라 분위기가 재미있기도 했다.


카페 주인분이 사이드 프로젝트를 하시는 것인지, 추가 생업을 전개하시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카페의 브랜딩을 위한 아트워크에 꽤 많은 공을 들인 것 같았다. 맛있는 크로플 냄새가 훅 끼치고, 빛깔이 좋은 오브제에 눈과 코가 동시에 즐거워지는 곳이다. 


바우하우스 포스터를 연상시키는 WTVR의 벽면 그림.



왓에버 스티커들은 내 랩탑에 몇 개 끼얹고 싶은 만큼 귀여웠다.



따뜻한 크로플을 썰어 먹으며, 오늘의 드로잉 퀘스트 클리어.



이 날의 자체 과제로 채택한 '최근 본 포스터 그리기' 퀘스트를 성실히 수행하기에 좋았다. 빨/파/노를 중심으로 한 귀여운 장식물들에 계속 눈이 간다. 해가 저물 즈음에는 그림자로 드리워진 타이포그래픽을 보는 낭만도 있었다. 이쯤 저물었다면 기차 시간이 가까워왔다는 얘기겠지, 마저 남은 크로플 한 조각을 쏙 하고 입에 넣었다.



해가 저물면서 벽에 자연스럽게 드리우는 Whatever. 나만 누리는 것 같아서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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