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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링 Dec 16. 2020

칸쿤, 휴양지를 싫어하는 여행자

멕시코 Secrets the Vine Cancun



먹고 자기만 하는게 어떻게 여행이 될 수 있어?


우리에겐 저마다의 여행 취향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지독하게 바쁜 여행을 사랑하는 나로서는 휴양 여행에의 경험이 없었다. 휴양지라면 두루 섭렵한 회사 선배들이 '내가 이만큼 잘 쉬었다'고 전하는 후일담도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여행이란 모름지기 '내가 이만큼 파란만장했다'가 맛 아니던가. 그 흔한 방콕, 발리, 세부, 보라카이, 하와이 한 번 가본 적 없다. 도시와 연이 없었다고 하기엔 내가 이들을 고의적으로 세차게 외면해왔다. 먹고 자는 것뿐이 휴양이 여행이 될 수는 없노라고 고집을 부렸다. 



단짠스러운 여행의 쉼표 : 뜻밖의 칸쿤


소중한 여름 휴가를 함께 보낼 친구와 뉴욕 여행을 계획했다. 뉴욕을 제대로 보고오자는 욕심을 한껏 펼치던 중, 친구가 문득 나에게 한 마디를 건내었다.


 "칸쿤도 한 번 가볼래?" 


도시를 복닥거리며 바삐 일정을 소화할 생각이라 각오는 되어 있었지만, 빽빽함을 전환해줄 아이디어에 어쩐일인지 귀가 쫑긋했다. 그저 새로운 도시의 이름에 끌렸을 뿐이었다. 이틀 정도는 빼볼 수 있겠는걸. 그리하여 뉴욕에 체류하는 기간 중 잠깐 칸쿤을 다녀오는 뜻밖의 여정이 추가되었다. 



초록색 주스를 불끈, 초록색 백팩에 오리발을 질끈
멕시코에 왔다! 항상 공항의 이 표지판을 볼 때가 가장 설레인다
생각보다 여의치 않던 폭풍우 속 첫 날의 칸쿤





칸쿤의 기선제압


로비에 들어서니 직접 건내는 웰컴 드링크. 어라? 기분 좋은 첫인상이다. 

정신이 없는 통에 한 잔을 마셨고, 무장해제가 시작된다. 기분 좋은 인포의 안내와 올인클루시브(All-Inclusive : 호텔 이용중 일체의 숙박, 식사, 시설 이용료를 정액으로 선결제 하는 방식)의 든든함이 우리를 감싼다. 짐을 풀면, 더이상 지갑을 꺼낼 필요도 없었다. 고개를 돌리면 향긋한 커피를 건내는 마사지사, 살사 댄스를 권하는 수영강사, 신선한 과채를 꺼내는 셰프가 연이어 미소를 건낸다. 벌써 두 손을 들기 직전이다. 



샴페인 첫 잔을 짠, 모히토 두 잔을 짠 
발코니에 나서면 나를 향해 한꺼번에 몰려드는 바다 
고층 없이 뚫린 바다와 썬베드에 누운 여행이라니. 






시간을 잃고 신선처럼 마시기


눈을 뜨면 아침이었다. 그리고, 시계를 살피지도 않고 도처에 널린 바에서 목을 축였다. 가만히 누워있어도, 내가 당연히 목마를거라 친히 배려하는 사람들. 덕분에 마시지 않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천천히 종일 마시니 정말 시간이 여기서 멈춘 것인지, 사라진 것인지 알 수 없는 세계에 있는 것만 같은 기분. 고주망태가 되라고 권장하는 바는 아니지만, 한 번쯤은 느껴볼 유희임은 분명하달까. 


은은한 취기, 유려한 서비스, 격한 널부러짐. 서울러로서의 정체성을 살짝 까먹을 정도가 되었으니, 이것도 분명 내가 지향하는 '일상과의 유리'라는 면에서 확실히 '대단한' 여행이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데킬라, 칵테일, 맥주를 골라마시는 장면



간 자리마다 코로나, 여행 중 맥주는 항상 코로나. 



어느 오후, 식사를 마치고 물멍(물을 보며 멍때리기)을 지속하는데 옆 편의 레스토랑 매니저가 우리를 불렀다. 방금 배를 채웠기 때문에 미소를 지으며 거절했지만, 안 쪽에서 감지되는 어쩐지 흥겨운 분위기에 이끌려 일단 입장했다. 추가 Charge가 없기 때문에 우선 나초와 간단한 사이드디쉬를 주문했다. 그리고 매니저가 건내는 흥미로운 제안,


"여기서는 데킬라를 어떻게 먹는 줄 알아?"


앗.. 사실 모른다. 알고 싶다. 그러나 '어떻게'는 아니어도, 일단 마실 줄은 안다. 데킬라 2샷을 서로의 앞에 놓아준다. 이어지는 매니저의 부연, 망설임 없이 짝-(쫙이 아니다) 마시고, 라임을 짝-하고 털어넣어야 한다는 것. 뭐야, 나도 이태원에서 이 정도는 소화하는 사람인데, 여유롭게 원킬 원샷을 시행했다. 그리고 매니저의 추가 제안, 


"사실, 라임에 시나몬이나 고춧가루를 뿌려야 해. 한잔 더?"


연거푸 이어지는 2샷, 3샷. 우리의 반나절을 잠시 삭제해버린 데킬라 사태는 그렇게 그 어떤 대의명분도 없는 채로 갑작스럽게 벌어졌다고 한다. (모든 역사가 그러하듯이)



에스프레소 3샷이 아니고, 데킬라 3샷을 연거푸






꼬로록 잠겨서 완전히 일상을 차단하기


휴양의 경험이 없다보니, 숙소의 풀장을 드나드는 것도 처음엔 우스웠다. 점심 먹고 잠시 들어가는 세리머니 같은 것이 아닐까-하고 짐작했으나. 정말 하루 종일 꼬로록 잠겨버렸다. 썬베드 옆의 자투리 공간에서는 틈틈이 살사 댄스나 요가 클래스가 열렸고, 비키니 차림의 여행자들이 소그룹을 이루어 경건하게 몸의 근육에 힘주고 있었다. 


그 풍경을 야자수와 물빛에 비춰서 바라보고 있노라니, 대단히 평화로웠고. 과일맛 칵테일을 쯥쯥이다가 무심코 일어서서 몸을 튕겨보기도 하는 대담함이 내게 전이되었다. 물을 앞에 둔 채로  춤을 추고 싶으면 추고, 흥얼거리는 것만으로도 반나절이 금방 지났다. 실로 시간 죽이기가 너무 쉬웠다. 


물과 하늘이 색을 맞춘 풀장은 언제나 빠지고 싶어



폭풍이 조심스레 지나가는 중이라, 가끔 무거운 구름이 바다위로 머리를 디밀었다.


지지부진하게 계속 눌러붙은 고인 생각, 사소한데 내가 구차하게 매달리는 생각, 그 외 이유없이 계속 나는 생각이 싹 걷힌채로 내게 진짜 휴식을 선물한 기분이었다. 내가 사랑한 '바쁜 여행'에서는 그 기한 내의 TO DO LIST나 기록 강박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면 솔직히 거짓말이기에, 이 장르의 여행을 전격 수용하기로 결정한다. 가끔은, 이렇게 나와서 생각을 좀 씻고 가주는 게 좋겠어, 라며 이내 파란물 속으로 꼬로록 잠긴다. 


물빛이 넘실거리는 이 풍경, 어떻게 잃어야 하나.





칸쿤, 이걸 어떻게 잃어야 하나


떠나는 날은 항상 날씨가 좋더군



비행기에서 뚝 떨어져서 웰컴 드링크를 받아든게 아직 생생한데, 벌써 출국하는 공항 게이트에 서있었다. 내 첫 휴양 여행을 제안한 친구에게 거듭 감탄을 뱉으며 캐리어를 쥐고 방방 뛰었다. 일상을 싹뚝 잘라내고 생각을 말끔히 씻고 갈아끼운 듯한 여정. 내 시간을 팔아서 원래 내것이 아니던 새 시간을 사서 쓴 느낌이 제대로 들었달까. 이걸 도대체 어떻게 잃어야 하나, 지금 여기서만 가능한 것이기에. 


여행마저 매번 어렵게 다녔던 본인의 자취를 다시 더듬었다. 힘 좀 빼고 쉽게 가는 방법도 있다는 것. 시간을 부리는 법은 실로 다양하다는 것. 휴양지에서 널부러진 선배를 상상하면서 (내면의) 혀를 찼던 나를 회상하며, 그들에게 고백하겠다. 


저.. 다음은 발리에 갈까 합니다.  

우리의 마지막 한 잔. 소금을 포슬포슬 뿌려서 마신다. 




아직, 인천이 아니고 뉴욕을 향하는 중이라 매우 다행이라고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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