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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링 Feb 08. 2021

이스탄불, 불안하고 가난한 여행

가장 각별하게 빛나는 도시를 추억하며



자타가 공인하는 도시여행자로서, 전대미문의 '비행불가능' 기간의 장기화가 참 아깝고 속상한 요즘이다. 새로운 도시에 깃발을 꽂고, 그 낯선 경험들을 힘닿는대로 쌓아두기만 했었다. 이제는 잠깐 숨을 고르고, 내 크고 작은 여행의 자취들이 내게 남긴 것들을 넉넉하게 회고하기에 딱 좋은 시간이라고 여긴다.


이 시간이 길어지면서, 유튜브 홈을 매일 스크롤 하면서도 여행을 주제로 한 것들에 주로 가닿고 있다.

참 재미있게도 가장 사랑하는 여행유튜버인 ‘빠니보틀’의 여행스타일은 나와 굉장히 많이 닮아있다.

어려운 길을 골라서 가고, 웬만한 불편함에는 무디다. 가끔은 정보가 없는채로 들이받아서, '모르는 게 약'이기도 한 여행자. 철저하게 가성비를 따지는 거침없는 행보. 


그 코드를 쭉 따라가며 보던 중,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가장 각별한 도시를 발견한다. 바로, 이스탄불이다.





불안한 이스탄불, 그걸 지켜보는 나


이스탄불에 도착하기 직전, 광장에서 반정부 시위가 지속되고 있으며, 물대포로 경찰과 시민이 대치하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뉴스를 접했다. 내 몸집만한 여행가방을 수속과정에서 나르면서, 두려움이 엄습했던 게 사실이다. 이대로 인천행 비행기에 쏙 넣어지고 싶을만큼 막막한 마음을 느꼈다. 그치만, 여정의 마지막이었던 이 도시를 잘 누려보겠다는 다짐을 다시 모아서 굳히기에 이른다.


야간 버스를 타고 도착한 숙소에 짐을 푸는 순간부터 특별한 기억이 수놓였다. 숙소는 모스크(예배당) 코 앞에 위치했는데, 밤에도 계속되는 쩌렁쩌렁한 기도소리에, 도착 첫 날은 대단히 잠을 설쳤다. 완전히 새롭고, 아직은 불편한 기분에 사로잡혀 이 도시를 어떻게 여행해야 하나 애써 고민하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도착한 첫 날. 숙소에서 바라본 모스크. 정해진 시간에 울려퍼지는 기도소리가 강렬했다.



살며 기도하며. 예배당에 섞인 터키인들과 여행자들.





가벼운 지갑, 무거운 마음


십수개의 도시를 여행하고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이라, 남아있는 여행자금을 최소화하기 위해 1박에 1만원 남짓인 도미토리형 숙소에 묵었다. 배고픈 여행자들의 성지쯤 되는 곳이라, 이미 여행비를 소진해서 게스트하우스에서 근무하며 일당으로 이 곳에서의 체류를 연장하는 이란인 스태프도 만날 수 있었다. 내가 머물렀던 2층 침대의 아래에는 브라질에서 온 저널리스트가 있었는데, 당시 탁심광장에서 일어난 반정부시위를 급히 취재하려 온 것이었다.

매일매일 세계 각지에서 온 정체 모를 사람들이 뒤섞이어 왁자지껄하기도, 긴장감을 조성하기도 하는 공간이었다. 그 공간에서 꽤 장기체류자였던 나는, 매일의 갈등과 소동을 유연하게 피하는 법을 배웠다. 


결국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항상 씩씩하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경직된 이방인으로서의 하루하루를 보냈다. 이렇듯 매일이 떠들썩한 이스탄불에서는, 유난히 색이 진한 햄과 건조한 빵으로 하루의 힘을 보충하기도 했다. 든든하게 기력을 채우는 의식같은 것이었을까. 매일 아침 배부르게 소화했다. 마냥 위축된 생활로 흘려보낼 순 없잖아.


메마른 빵과 채소, 원초적인 맛과 향의 조식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반정부 시위가 열린 탁심 광장. 브라질 기자와 함께 방문했었다.



숙소를 오고가던 골목은 항상 강렬한 도시의 색채를 뿜었다.





가까이서 봐야 아름다운 구석들을 캐며 


온갖 메뉴에 붙은 케밥이 꽤 후덕하게 조리되어 나오는 것, 붉은 차를 홀짝이다 보면 근처 돌바닥에 드러두운 댕댕이를 지켜보는 것, 하루에 서너번쯤은 꼭 내게 함께 사진찍고 악수를 원하는 정감이 어린 손길들.


위축된 여행자는 결국 조그마한 구석까지 들어차있는 도시의 친근함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도시에 녹아내릴 수 있었던 것. 여전히 마음 졸여지는 쩌렁쩌렁한 심야의 기도소리, 불안한 2층 침대의 삐걱임, 내일은 무엇을 먹어야하나- 같은 생각들. 이 모든 것을 끌어안고서도, 해가 뜨면 나를 맞아주는 귀여운 것들에 신경을 쏟으며 치열한 여행자로서의 일과를 해치워나갔다. 


항상 식후에 마셨던 홍차, 그리고 주변에서 빨갛게 맞추는 장단



케이블카에서도 일가족이 내게 함께 기념할 사진을 부탁해왔다.




눈길을 돌리면 항상 하나같이 힘빼고 휴식중인 댕댕이들





다시 이런 여행을 할 수 있을까?


꽤 지나버린 시간을 단숨에 날아서 끌어올린 아직 빛이 바래지 않은 추억. 다시 윤이 반들반들 나게 닦아보고싶었다. 빠른 시일 내에 다시 '비행 가능'한 세상이 온다면, 주저하지 않고 이스탄불에 가볼 생각이다. 다만, 내가 기억하는 도시의 아우라가 여전히 내게 고스란히 전해질까? 그 때의 불안하고 가난한 여행자는 이후 분명 무엇을 잃은 적 없으며, 오히려 그때 이후로 더 얻었고, 가졌다. 그치만 아마도, 이 진득한 여행의 감각은 다시 돌이킬 수 없겠지. 


수많은 도시중에서 이 여행이 가장 각별한 것은, 내 20대의 가장 용감무쌍하고 날것의 여행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극복할 불안함이 있다는 것, 이 상태를 극복하면 '지금보다는 분명히' 낫다는 것- '밑져야 본전'이라는 썩 마음에 드는 슬로건을 부여할 나날들이 점점 줄어가고 있는 것 같아, 새삼스레 내 나잇값의 무게를 떠올린다. 그래도, 아직은 내일이 설렌다면 발굴되지 않은 무궁무진한 여행의 감각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겠지, 하고 생각한다. 



오후녘의 색채를 모아서 보면 꼭 이렇게 취할 가치가 있는 장면을 마주한다.



파노라마 뷰로 펼쳐지는 도시의 자태와, 하얀 구름, 파란 하늘과 물



옛 아낙네들의 빨래터처럼 이야깃거리가 여기저기서 풀려나오는 중



뜨거웠던 도시가 식어갈 때, 나도 하루의 힘을 조금씩 빼며 이완한다. 오늘도 잘 보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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