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DOSHI Bucket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베링 May 30. 2021

홍콩, 취향껏 만든 여행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 PMQ - Quinary




불편한 여행의 시작은, 에스컬레이터


에어비앤비로 이용한 숙소가 어쩐지 편치 않았다. 호스트 커플이 메인 룸에 있었고, 거실을 두고 내가 서브 룸을 이용하는 구조였다. 그들이 왁자지껄한 생활 패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부지런한 여행자가 되기로 하고, 빠르게 나오고 늦게 들어오는 스케줄로 움직였다. 전날 심야의 착륙에 뒤이은 피로를 잊기도 전에 빠르게 거리로 나와  여정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 향할 , 말해 무엇하겠어. '' 에스컬레이터를 타기로 한다.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중경삼림에 등장한 바로 그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쭉 오르막을 오르면 할리우드 거리와, 소호 거리, 조금 더 가면 란콰이펑으로 이어진다.


완만하고 천천하게 오르는 가운데, 비행기가 이륙할때와 유사한 상승감을 느낀다.



오래된 건축과 간판이 주는 도시의 무게감



쫓기듯 나오느라 불편한 심정에 더해서, 바지런하게 둘러 본 홍콩 거리의 첫 인상은 떠들썩하고 큼지막한 소비위주의 이미지로 점철되어 있어 "아무래도 내 취향은 아니다" 라고 감히 판단해버렸다. 쇼핑백 여러개를 들고 바삐 몰과 플래그십 스토어를 도는 여행자 군단이 눈에 띈다.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도시에서의 하루, 어떻게 만들어갈지 잘 스케치가 안되는 아침. 에스컬레이터 위에 서서 허공을 보는 여행자. 그게 나야나.


동선의 반경을 촘촘히 살펴보며 어디로 향해야 하나 망설이다, 소호 거리에서 슬쩍 빠져서 PMQ(police married quarters)에 당도하게 된다.




층층이 오를 수 있는 홍콩 디자인의 현재, PMQ


PMQ는 1951년에 세워진 경찰 기숙사 건물을 그대로 살렸고, 이름도 그대로 쓰고 있는 복합문화공간이다. 복도식 아파트와도 같은 구조 안에는 다양한 개성의 카페와 갤러리, 상점이 들어차있다. 창작 그룹의 작업 시간에는 닫기도 하고, 필요에 따라 열면서 운영 된다. 서울의 쌈지길, 홍대 놀이터와 비슷하게 느꼈다. 소규모 공방, 디자이너 브랜드, 미니 사진전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Fruit Jamming Market 테마로 한창 귀여운 단장을 뽐내는 중



내가 PMQ에 방문했을 당시, Fruit Jamming Market으로 중앙광장이 꾸며져 있어서, 과일이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었다. 중앙광장에서 압도적인 비주얼의 과일 모양 헬륨 풍선들이 무더기로 널부러져 있고, 마켓들은 모두 과일 아이템으로 소비를 자극한다. 과일 소다, 과일 학용품, 과일 향초, 과일 성분의 천연 화장품, 과일건조칩이 알록달록하게 반긴다. 언젠가 우연히 들어섰고, 잘 먹지 않는 과일청을 가득 쟁였던 마르쉐가 오버랩되기도 하는 순간이다.



위에서 바라보니 과일 나라의 아이들과 그걸 지켜보는 부모님들


층을 더 오르면, 젊은 컬렉터의 시선과, 유화그리기 대잔치와, 커피올로지 전공자를 만날 수 있는 곳.



해가 조금씩 저물수록, 사람들은 더욱 모인다.




취한 밤을 빼기는 힘들테니, Quinary(퀴너리)


이 도시의 밤은 낮보다 확실히 아름답다. 재미있는 점은, 해가 질수록 사람들의 발길이 모이는 방향이 유사했다는 것. 홍콩에서 취한 밤을 빼기는 아쉬울 터, 내 자리를 사수하러 빠르게 동선을 옮긴다. 세계의 유명한 바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칵테일 바를 찾았다. 분자 칵테일을 다루는 곳이라, 제조과정에 도구나 기법이 많아서 바텐더의 퍼포먼스를 보는 것도 재미가 되는 곳.


에스컬레이터를 배경으로 널따랗게 퍼져서 노상 음주를 즐기는 일행이 많았다.



호기롭게 대문을 열어젖히니, 나보다 훨씬 빨리 밤을 시작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이미 꽉 찼다. 엄청나게 빠른 손길로 얼음을 깎고, 잔을 닦아올리고, 술병을 교체하는 바텐더들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허락된 자리에 운좋게 걸터앉게 되었고, 느긋하게 메뉴를 훑어내려갔지만 사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방문했던 시점에도 그렇고, 현재도 여전히 대표 칵테일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얼그레이 캐비어 마티니를 주문하고, 바텐더가 능숙하고 빠르게 연달아 아웃풋을 만들어 내는 것을 구경하니 금세 내 자리에 서빙된다.



맛있는 칵테일을 달라고 보채는 고객들을 진정시키는 포포먼쓰 되시겠다.



얼그레이 케비어 마티니를 첫번째 칵테일로 픽, 몽글한 거품 지키며 마시는 것이 핵심



얼그레이 케비어 마티니(Earl Grey Caviar Martini) 는 보글보글한 거품에서 얼그레이향이 나고 아래에는 캐비어가 잠수되어 있는 마티니다. 바텐더가 장인의 손길로 쌓아 올린 거품탑을 용케 안 무너뜨리고 우아한 모습으로 클리어하며 뿌듯함을 챙긴다.


두번째로 선택한 칵테일은 미스 로사 김렛(Miss Rosa Gimlette). 옆 자리의 여자분이 먹는 모습이 귀여워서 즉흥적으로 선택하게 되었다. 칵테일이 묵직하게 풍덩 잠기는 카카오 아이스볼을 만드는 과정이 신기했다. 큰 아이스볼에 카카오 코팅을 즉석에서 입히고 예쁜 색깔의 롤리팝을 얹어서 제공한다. 술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 데이트에서 분위기 내고 싶을 때 시키는 메뉴같은 느낌이라, 내가 즐기는 류는 아니었다. 하지만, 칵테일은 본디 본위기로 마시는 술이 아니던가. 달콤하니 무알콜같은 슴슴함(?)에 홀짝이며 천천히 마셨다.



미스 로사 김렛. 소개팅에서 마시는 달달한 분위기용 음료로 적합했다.



낮에 마주친 간판에 뒤지지 않게 화려하게 수놓인 위스키, 와인들의 향연



여전히 눈이 즐거운 면면들. 살짝 취해서 아쉬이 숙소로 걷는 길에 무드를 형성해준다.



알딸딸한 상태로 홍콩 밤거리를 걸으니 오늘 하루가 완성되었다고 느낀다. 첫인상이 좋지 않아 그저 우려하던 도시였는데, 좋은 구석만 골라담으니 하루가 넘치게 꽉 찼다. 내 취향대로 도시를 즐기는 방식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여행의 재미고, 여행자의 능력이 아닐까 생각했다. 취향껏 접붙인 홍콩의 면면들로 즐거운 하루를 만들 수 있었던 것처럼. 볼 수 있는 만큼 보고,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나서 지도의 한 점에 나만의 정의를 내린다면 그것대로 '여행의 완성'이다.



아침보다 여러모로 아름다워진 홍콩의 밤을 천천히 감상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스탄불, 불안하고 가난한 여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