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달 와이파크 미술관 - 중부내륙 커피집 - 청록다방
슬슬 달궈지는 아스팔트 속 겨우 그늘을 찾으며 초여름을 보내고 있다. 물에 풍덩 빠지기 보단 서늘한 산 냄새가 맡고 싶었다. K-산맥이 뽐내는 쨍한 여름의 색깔들을 더 잘 찾을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졌다. 오랜만에 무궁화호 기차표를 예약하고, 꼭두새벽부터 배낭을 들쳐멨다. 눈을 꼬옥 감았다 뜨니, 산맥으로 둘러진 귀여운 기차역 앞에 도착하게 된다.
소도시를 오고 가며 가장 큰 존재감을 발휘하는 동강의 줄기는 연두빛~청록~연하늘을 그라데이션으로 빚은 모습이다. 후덥지근한 공기와 강바람이 부딪힐땐 살짝 땀을 식힐 수 있었다. 해가 뉘엿거리는 저녁 즈음에는 노란색~핑크빛까지 곁들여져 무드가 좋은 하루의 마무리를 선사해주었다.
지역 특산물이나 어설픈 브랜딩으로 실망한 기억이 많았는데, 영월이 '꽤 진심이구나'싶었다. 영(Young) + 월(Moon, 月)이 되는 과정을 응원하고 싶었달까. 붉은달 미술관, 목성, 붉은 파빌리온으로 구성된 코스는 실험적인 작품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서울의 많은 미술관에서 스케일적으로 아쉬움을 느꼈는데, 널찍한 구획으로 꾸며둔 설치미술 작품들을 돌아 거닐고 있노라면, 공간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새빨간 금속파이프로 뼈대를 만든 공간은, 흡사 빨간 소우주와도 같은 형상이다. 실제로 영월의 공간 재생 프로젝트를 주도한 최옥영 작가는, '무한의 우주를 어떻게 표현해낼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이 공간을 내어 놓았다. 원래 '술샘박물관'으로 최초 개관했던 이 곳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방치되다가 작가가 불어넣은 새로운 생기에 <젊은달 와이파크>로 다시 태어나게 됐다. 여행자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 조금은 서툴러보였던 이 도시가 조금씩 꿈틀대고 있다. 영월에 온다면 한번은 누려봄직한 곳이다.
뭔가 잊은게 없나 싶었는데 커피를 깜빡했다. 큼지막한 반경으로 영월을 쏘다녔더니 어느새 카페인이 절실한 늦은 오후로 접어든다. 서부 시장의 잡화점과 식품가게를 둘러보다가 거부할 수 없는 시그널을 수신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커피'를 원한다면 당장 배낭을 내려 놓고 쉴 수 있는 공간을 마주한다.
무엇을 마셔야할지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었는데, 주인분께서 진중한 모습으로 커피 컨설팅을 해주신다. 이미 내륙의 커피장인으로 유명하신터라, 막힘없이 자신감있게 권하는 메뉴를 따랐고 짐을 잠시 풀었다. 연이어 누룽지를 뽀개어 넣은 초콜릿도 추가했다. 초콜릿향이 밴 드립커피와 상큼한 맛이 더해진 미숫가루, 진한 라떼를 조금씩 맛보며 더운 숨을 식힌다.
몇 모금씩 커피가 들어가니, 잠시 일상의 대화들이 터진다. 잊고 있던 주변의 근황, 자산 증식에 대하여, 일터와 직업, 연예면과 유튜브 채널들 - 가볍고 무거운, 멀고 가까운 주제들을 내키는 대로 전환해가며 시간을 보냈다. 커피는 분명 대화의 원동력이다. 어느새 비워진 잔을 확인하고 자리를 털고 선다. 잘 마셨습니다.
영월에 머무는 동안 해가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가도, 구름이 간섭없이 물러나 있다보니 땡볕에 말라붙기 일보 직전이다. 이 도시에서는 카페놀이를 하기가 쉬운 편은 아니었는데, 역사가 오래된 다방에 들어앉아 쉬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큼지막한 화초들이 창가에 늘어서 있고, 적당한 채널을 골라 틀어져있는 TV가 배경음악을 대신하고, 메뉴에는 오랜만이라 더욱 반가운 라인업이 눈에 띈다. 블랙커피, 냉커피, 쌍화차, 모과차, 오미자차, 칡차, 생마즙. 에스프레소가 주인공에서 밀려나 있는 추억의 메뉴판이다. 공복에는 으레 따뜻한 커피를 부어주어야 하지만, 남다른 존재감의 쌍화차가 당기기도 한다. 즐거운 고민을 하는 동안, 이미 손이 바빠지기 시작하신 아주머님의 모습이 보였다.
바로 옆에 위치한 단종의 마지막 유배지인 관풍헌에서 자규루를 보고 온 직후다. 전날에는 청령포에 들른 바 있어, 저녁부터 단종 토크를 이어왔다. 쌍화차와 생마즙을 머금고 한번씩 다시 언급해본다. 영월을 관통하는 큰 줄기는 분명 단종임에는 틀림없다고. 문학으로 즐겼다기 보다, 어느 문제집 한켠에서 힘들여 색깔펜으로 체크해봤던 글귀에 지나지 않았는데, 어린 왕의 슬픈 역사를 도시 전체에 걸쳐 거닐고 나니 어쩐지 애틋해진다. 아주 오랜만에 자규시의 일부분을 발췌해 읽고 나니 여운이 남는다. 600년이 다되어가는 구절이다.
나는 한마리
궁궐을 쫓겨난 원통한 새
짝지을 그림자도 없는
외로운 몸 산속을 떠도네
잠 못드는 밤이 가도 밤이 와도
잠은 오지않고
한맺힌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새울음 끊긴 새벽
산마루에 달빛 걸려 있고
피맺힌 봄 강물에
지는 꽃이 더 붉구나
하늘은 귀머거리인가
내 애끊는 소원 듣지 못하고
슬픈 내 귀에 소쩍새 울음만 들리는 것이냐
빵집과 구옥 스테이를 동시에 열고 아늑한 공간을 베푸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호스트의 센스, 씁쓸한 더덕주를 찔끔 홀짝이며 단종의 청령포 유배 생활을 애달프게 여긴 저녁 시간, 동강을 찾아 걷다가 만난 동네 꼬마와 개냥이들, 여름 땡볕에 말라붙지 않고 위트를 발휘하는 귀여운 골목의 면면들.
여름 산의 기운과 힘껏 기력을 완충해주는 공간들은 물론이고, 여정에서 마주친 귀여운 구석들도 소중히 간직하게 된다. 여행이 늘어날수록, 이렇게 모은 조각들이 도시를 기억하는데 있어 더욱 강한 이미지로 기록된다. 영월 여정의 마지막 무렵에서 마주한 한 전시의 테마는 <영월, 사소한 시선>이다. 주민이자 작가의 시선으로 기록한 영월을 전시로 만나보는 기획전이다. 여행자에게는 이 사소함이 여행의 재미이자 전부라고 본다. 큼지막하고 뻔한 것보다, 이런 작은 구석을 찾아보는 맛. 부지런히 시선 돌리다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