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아빠살이] 행복하기 위해 아이를 가진 게이 아빠 이야기
인정받기 위해 아이를 가지게 됐어요. 그런데 키우고 보니까 제 행복이더라고요.
커밍아웃 20년 차. 가족들은 아직도 그를 인정하지 않는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이라고 수없이 외쳤지만, 여전히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다. 이제는 그가 기댈 수 있는 또 다른 가족이 있다. 일곱 살 행복이를 통해 비로소 행복해진 게이 아빠 비렐(43) 씨의 이야기다.
누나가 알아버렸다. 게이 카페 인터넷 페이지를 미처 닫지 못한 게 화근이었다. 당장 어머니까지 알게 됐다. 그는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는데 가족들에게조차 말하지 못한다면, 다른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많이 힘들다는 걸 가족들이 알아주길 바랐다.
“그때가 23살이었어요. 20년이 흘렀네요. 어머니와 누나에게 커밍아웃(성소수자가 자신의 성적 지향이나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일)을 했어요. 어머니가 절 이해해 주시고 품어주시리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어요. 극심하게 반대하셨어요. 외출도 자유롭지 못할 정도였죠.”
아들의 커밍아웃을 듣게 된 어머니는 ‘내가 잘 못 낳았다’라고 말했다. 그는 존재를 부정당했다는 생각에 심리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지금도 그 말이 깊은 상처로 남아있을 만큼.
“너무 힘들었어요. ‘잘못 키웠다’가 아닌 ‘잘못 낳았다’라고 말씀하셨거든요. 사실은 ‘우리 아들 힘들었겠구나’라고 하시며 안아주실 줄 알았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저는 분명 게이였지만 어쨌든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같이 살아가야 하니까 애써 제 정체성을 부정하기도 했어요. '엄마가 잘못 낳은 게 아니고, 나도 문제가 있는 게 아니다'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어요. 그래선 안 됐지만, 일부러 여자친구를 만나기도 했어요. 하지만, 오히려 내가 게이라는 확신만 들더라고요. 한편으론 어린 마음에 반항심도 생겼어요. 일부러 게이와 관련된 것들에 더 관심을 가지기도 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참 슬프고 혼란스러웠던 시기였습니다.”
믿었던 엄마에게 인정받지 못한 그는 아버지를 비롯해 다른 누구에게도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다.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지만, 누군가는 짐을 짊어진 상황. 그렇게 혼란스러운 나날이 지속됐다. 그러던 어느 날 흔들리던 그의 정체성이 바로 서는 사건이 일어났다.
“친누나를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어요. 제가 훈련병 시절에 그 사람이 군 간부를 통해 냉동식품을 사주기도 할 정도로 누나와 깊은 관계였어요. 그런데 게이 카페에서 그 사람을 보게 된 거예요. 충격을 많이 받았어요. 왜냐하면, 그때 당시에는 누나와 결혼까지 생각했던 사람이었거든요. 누나와 어머니께 이 사실을 말씀드렸는데, 놀라기는 하셨지만 크게 개의치 않으셨어요. 왜냐하면, 그 사람이 누나와 실제로 결혼하진 않았거든요. 지금은 남 일이 된 거죠. 사실 가족들의 압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반 여성과 결혼을 하는 게이가 꽤 많아요. 결혼 이후는 생각하지 않는 거죠.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결혼 생활이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런 무책임한 선택이 남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제 친누나의 일이 될 수도 있었던 거고요.”
그는 누나를 속인 그 사람처럼 거짓된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일반인인 척 이중생활을 하기도 싫었다. 그래서 어학연수를 핑계 삼아 호주로 떠났다.
게이인 그는 한국에서 차별을 받지 않았다. 일반인인 척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커밍아웃을 한 사람들을 '대단하다'고 표현했다.
“한국에서 게이임을 드러낸 사람들은, 본인의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다음 세대의 게이를 위해 희생하시는 것 같아요. 저는 그러지 못했어요. 그때는 용기가 없었거든요. 가족의 지지를 받지 못했잖아요. 기댈 곳이 없는 상태에서 받게 될 비난이 두려웠어요.”
한국의 가족들은 여전히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피해 주지 말고 호주에서 조용히 살다가 일반인들처럼 결혼하라고 했다. 인정과 위로는 없었다. 그는 가족들과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졌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다가도 이따금 마음이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해마다 두 번 정도 한국에 들어갔는데, 어머니는 어떻게든 제 마음을 돌리려 애쓰셨어요. 가족들이 원하는 선 자리에 나가기도 했어요.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한 거죠. 그런데도 제 마음이 바뀌지 않으니까 여권을 숨겨버리시더라고요. 성정체성은 가지고 태어나는 거예요.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죠. 하지만 어머니는 이해하지 못하셨어요. 계속해서 제 정체성이 부정당하니까, 모든 일이 안 좋게 흘러갔어요. 그 과정에서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여권을 재발급받아 다시 호주로 도망갔습니다.”
그는 가족들을 행복하게 해 줘야 내가 행복한지, 아니면 내가 행복해야 가족들이 행복한지 혼란스러웠다.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깊어진 고민을 당시 호주에서 만나던 사람에게 털어놨다.
“‘가족들이 잘못된 거지 네가 잘못한 게 아니다. 우리는 이렇게 태어난 거다.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 우리답게 살아야 한다’라고 말해줬어요. 가족들은 저를 부정했지만, 이 사람은 달랐어요. 심리적으로 흔들리지 않게 지지해 줬어요. 유일하게 내 편이 되어준 거죠. 그때, ‘이 사람이라면 내 미래를 걸만하겠구나, 함께 살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2013년, 그는 지금의 파트너와 결혼식을 올렸다. 물론 가족들은 이번에도 반대했다. 일반 여성과 결혼하길 바랐지만, 그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부모님의 인정을 받기 위해 거짓된 삶을 살면서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속이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결혼식장에 아무도 오지 않으셨어요. 파트너 가족들은 모두 참석했고요. 마음이요? ‘안 되는 건 안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마디로 가족과 ‘졸업’한 느낌이었죠.”
그가 가족에게 인정받기 위해 노력한 세월만 7년이었다. 하지만 가족들의 축하를 받지 못했다. 행복해야 할 결혼식 날, 그는 덩그러니 혼자 서 있었다. 그가 어렵게 선택한 ‘졸업’이란 단어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는 행복해지기 위해 커밍아웃을 했으며, 더 행복해지기 위해 동성과 결혼을 했다. 내가 행복해야 가족도 행복해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인정하지 않는 가족들은 그의 마음에 짐으로 남았다. 그는 가족으로서 아들로서 그리고 게이로서 무척이나 인정받고 싶었다. 아이를 갖기로 결심한 것도 같은 이유다.
“비록 일반 여성과 결혼하진 않았지만, 부모님 품에 아이를 안겨드리면 인정하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보통 어른들은 결혼해서 애를 낳는 걸 인생의 행복이라 생각하잖아요. 저희 부모님도 그렇고요. 더구나 제가 장손이라 부모님이 항상 손주를 보고 싶어 하셨거든요. 그래서 오랜 고민 끝에 아이를 갖자고 파트너에게 말했습니다.”
게이 부부가 아이를 갖는 일은 호주에서도 매우 드문 경우다. 그 과정이 매우 어렵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트너는 단박에 동의했다. 당장 어떤 방식으로 아이를 가질지 의논했다.
“크게 대리모와 입양으로 나뉘어요. 보통 서양인들이 동양 아기들을 입양하는 경우가 많은 반면, 동양인이 동양 아기를 입양하는 경우는 적은 편이죠. 특히 동양인 게이가 아이를 입양하는 건 더 어려운 일이에요. 그래서 대리모 방식을 선택했어요.”
출산 당일, 부부는 대리모가 있는 태국으로 향했다. 아기는 제왕절개 분만으로 태어날 예정이었다. 부부는 마음을 졸이며 아이를 기다렸다. 잠시 후, 의사의 호출을 받고 탯줄을 자르기 위해 분만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일로 쫓겨났다.
“나중에 들었는데 아기에게 약간의 출혈이 있었다고 했어요. 분만실에서 의사들이 우왕좌왕하더라고요. 다른 의사도 더 들어오고.. 그래서 탯줄을 못 자르고 나오게 됐어요. 지금 생각하니 그게 제일 아쉽네요. 평생 한 번 있는 일이었는데...”
다행히 아기는 이상이 없었다. 결국, 신생아실에서 아기를 처음 안았다. 그는 아기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며 ‘솔직히 특별한 느낌이 없었다’고 털어놨다. 평소에 가지고 있던 출산에 대한 환상과 현실이 너무 다르기도 했지만, 물리적으로 아기가 대리모의 뱃속에 있었던 열 달을 함께 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아기가 까맣고 쪼글쪼글하더라고요. 조금 낯설었어요. 특히 피부가 너무 까매서 처음에는 ‘내 아기가 아닌가?’라는 의심도 들더라고요. 행복해야 할 출산이었는데, 분만실서 목격한 사고 때문에 의료진에 대한 의심만 가득했죠. 지금 생각해 보면 출산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든 생각 같아요. 막 태어난 신생아는 저도 처음 본 거니까요.”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아이를 안았지만, 호주로 돌아가려면 두 달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태국에서 출생신고를 하는 데 1주일이 걸리고, 발급된 출생신고 서류를 호주로 보내 DNA 테스트로 친자확인을 받는 데 두 달이 걸리기 때문이다.
“두 달 동안 호텔에 머물렀어요. 그런데 육아 경험이 전혀 없는 아빠 두 명이 아이를 어떻게 돌볼 수 있겠어요? 그래서 한국에 계신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어요. 결혼식에는 안 오셨지만, 그래도 손주가 태어났으니 도와주실 거라 믿었거든요.”
어머니는 한달음에 달려오셨다. 커밍아웃 이후 처음으로 마음을 여신 것이다. 손주의 힘이다. 태국에 오신 어머니는 두 달 동안 육아에 무지한 두 아빠에게 아기 돌보는 방법을 세심하게 가르쳐줬다.
“7~8년 동안 어머니와 떨어져 지냈잖아요? 오래전에 아들이 게이라고 말씀드렸지만, 실제로 어머니는 게이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으셨어요. 그러다 아기 때문에 두 달 동안 저희 부부와 함께 지내게 되시면서, 이전보다는 조금 더 이해하고 인정하게 되신 것 같았어요. 물론 100%로는 아니지만, 저는 조금이라도 진전이 있어서 기쁘더라고요.”
육아에 힘들어하는 그를 보던 어머니는 아기가 아직 어릴 때 한국으로 보내주면 손수 키워주겠다고 했다. 여느 부모들처럼 ‘아기는 엄마가 꼭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엄마의 부재를 아프게 꼬집었지만, 그는 생각이 달랐다.
“부모와 자식 관계는 그냥 생기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자식 키우는 게 쉽지 않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서로 부딪히면서 성장하는 게 가족 아닐까요? 힘들어서 눈물도 흘려보고, 아이와 애틋한 경험도 해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마음은 감사했지만, 아이가 어머니 품에서 크고 난 후 호주로 데려오는 건 제 생각과 다르다고 말씀드렸어요.”
호주는 2017년 12월에 동성간 결혼이 합법화된 나라다. 전 국민 투표 결과 61.6%가 동성 결혼의 합법화를 지지할 만큼, 성소수자가 최소한의 법적 보호를 받는다. 그렇다고 모든 호주인들이 성소수자들에게 관대한 건 아니다. ‘다름’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들은 여전히 성소수자들을 차별한다. 그것도 직설적으로.
“한국이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심하잖아요. 그런데 정작 저는 한국에서는 차별을 받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일반인인 척하고 살았으니까요. 오히려 호주로 와서 차별을 받고 있어요. 참 아이러니하죠? 호주라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성소수자들을 환영하는 건 아니에요. 서양은 워낙 개인주의가 강해서 자신과 연관이 없으면 괜찮지만, 아닌 경우에는 불편해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어떤 학부모는 게이 가족이라는 이유로 저희 아이를 다른 반으로 옮겨달라고 요구한 일도 있었거든요.”
물론, 아이는 반을 옮기지 않았다. 법적으로 최소한의 보호를 받은 것이다. 문제는 이런 차별이 앞으로도 아이에게 생길 거란 점이다.
“지금 아이가 다니는 학교의 학생 수가 580여 명 정도예요. 게이 가족은 저희 아이가 유일해요. 동성혼이 합법인 호주에서도 극소수인 것이죠. 학교 친구들이 아이를 신기하고 이상하게 보는 게 당연해요. 다르다고 받게 되는 차별을 아이도 겪을까 항상 걱정스러워요.”
일곱 살이 된 아이는 아직 게이에 대한 이해가 없다. 설명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다. 하지만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자신과 다른 친구들을 겪으면서 여러 가지 의문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가 3살 때 일이에요. 같은 반 친구가 ‘엄마가 있으면 참 좋은데, 넌 엄마가 없어서 참 안 됐다’라고 말했데요. 궁금해서 물어본 거겠죠.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온 아이가 자기는 왜 엄마가 없고 아빠만 둘이냐고 묻더라고요. 저는 말해줬어요. ‘너는 아빠가 두 명이잖아? 그래서 아빠가 두 배로 놀아줄 수 있어’라고.”
그는 어린 시절 성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무척 힘들었다고 했다. 당시에는 관련된 상담 기관도 없었고, 무조건 반대하는 가족들에게 기댈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 번은 아이가 겪어야 할 부분이지만, 아빠가 게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덜 받길 바란다. 그래서 미리 여러 가지 노력을 하고 있다.
“게이 아빠들 모임이 있어요. 아이와 함께 가끔 참여합니다. 아무래도 자신과 비슷한 환경의 친구들을 만나다 보면 ‘나만 이런 게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될 거예요. 그런 경험들을 통해 훗날 우리가 그냥 다른 거지 특별한 게 아님을 이해하길 바라요. 그러면 나중에 아빠가 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덜 혼란스럽지 않을까요?”
그는 게이와 관련된 책도 자주 읽어준다. 다문화 가족, 입양 가족, 한부모 가족, 장애인 가족처럼 다양한 가족들의 이야기다. 정해진 가족의 형태는 없기 때문이다.
“게이 아빠를 둔 아이의 상황이 아무래도 일반적이진 않잖아요. 제가 게이로서 굴곡진 삶을 살아 보니, 항상 행복한 건 아니더라고요. 훗날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아이가 꼭 행복하길 바라요. 그래서 한국 이름을 ‘행복’이로 지었습니다.”
그는 게이이기 이전에 한 아이의 아빠다. 여느 부모들처럼 아이의 교육과 육아에 관심이 많다. 게이라고 해서 특별하지 않다. 굳이 있다면 엄마 역할도 해야 한다는 점.
“호주도 한국처럼 아이들 케어하는 부분은 엄마들이 많이 하는 편이에요. 아이들 등원이나 하원, 학부모 모임 등이 그래요. 저는 게이 아빠지만 엄마 역할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학부모 모임을 가면 저만 남자인 경우가 많아요. 엄마들만 있다 보니 처음에 많이 어색하더라고요. 분위기에 적응하기도 힘들고. 또 여자들끼리 통하는 이슈에도 공감하기 어렵다 보니 친해지기 힘들었어요. 아시겠지만, 엄마들끼리 아이들 육이나 육아 정보를 공유하기도 하잖아요.”
반대로 남자기 때문에 엄마들이 힘들어하는 일은 그에게 수월하다. 아이와 함께 갈 수 있는 곳들은 거의 다 다녔는데, 다른 엄마들은 힘들어서 엄두도 못 낸단다. 아무래도 힘쓰는 육아는 체력적으로 보통 엄마들보다 좋으니까 유리하다. 물론, 그도 힘들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육아하는 엄마들을 새삼 대단하다고 느낀다.
“보통 게이라고 하면 여성적이고 동성에게 관심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보통 엄마 역할도 잘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개인차가 있거든요. 게이가 동성에게 관심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성향은 모두 달라요. 홍석천 씨 같은 몇몇 연예인들이 유명해지면서 게이에 대한 이미지가 ‘여성적인’ 사람으로 굳혀진 것 같아요. 하지만 저처럼 다른 성향을 가진 게이도 있거든요. 저는 게이지만 그냥 보통 아빠입니다.”
보통 아빠는 아들 자랑을 잊지 않았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소소한 일이라도 아이의 성공이 꼭 내 일 같고, 세상에서 내 아이가 최고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 역시 아들 자랑을 좋아하는 팔불출 아빠다.
“행복이는 성향이 활발한 편이라 공부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최근 코로나 때문에 온라인 수업을 하게 됐는데, 제가 옆에서 엄청 가르쳤더니 어느 날 학교에서 상을 받아오더라고요. 아이가 처음 받은 상이 었어요. 그게 너무 뿌듯했어요. 하하. 부모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식을 키우면서 비로소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됐다. 아빠로서 아이의 입장을 생각하고 배려하면서 자연스럽게 20년 전 부모님이 떠오른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에겐 아직도 커밍아웃을 하지 못했다. 어쩌면 불효가 될 수도 있기에.
“저는 제가 다 알아서 큰 줄 알았어요. 어렸죠. 행복이 키워보니까 ‘그게 아니었구나’를 깨달았어요. 부모님 사랑과 희생으로 제가 큰 거죠. 어느 순간, 아직도 저를 인정하지 않으시는 부모님 입장도 이해가 되더라고요. 특히 아버지는 아직도 제 사정을 모르세요. 내 마음 편하자고 커밍아웃하는 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일이에요. 내가 준비한 만큼 상대방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는 게이의 삶을 선택했다. 하지만 행복이는 부모를 선택할 수 없었다. 태어나 보니 아빠가 게이였던 것이다. 20년이 지났지만 세상은 아직도 ‘다른’ 사람들에게 차갑고,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 그는 자신처럼 사람들의 편견에 아파할지도 모를 아들을 걱정했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그가 긴 세월을 돌고 돌아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배려하게 된 것처럼, 행복이도 훗날 자신을 이해해 주길 바랐다.
“아들아. 아빠는 살면서 너무 우리 가족들 위주로 살았어. 살아보니까 그게 다는 아니더라. 자기 행복이 먼저고, 그다음이 가족이더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 어떻게 남을 사랑하고 도와줄 수 있겠니? 나중에 우리가 게이 부모인 게 싫으면 미워해도 괜찮아. 단지, 네가 행복한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이 옳았으면 좋겠다. 어떤 선택을 할진 모르지만, 아빠는 모두 받아들일 생각이다. 그게 부모니까.”
[알림] 이 글은 베이비뉴스(www.ibabynews.com)에도 게재됐습니다.